고운 최치원은 신라 견일의 아들로 태어나 12세 되든 해에 중국 당나라로 유학하여 7년 만에 급제한 수재로 당나라에 7년간 머물면서 문인들과 글재주를 겨누면서 유명한 토황 소격문을 남겼다.
신라 말기 6두품이라는 신분으로 출세에 대한 실망과 좌절로 40세에 관직을 버리고 신라 전역으로 순례했든 최치원.......!
29세에 중국에서 귀국 한 뒤 기울어가는 신라를 바로 세우려 하였으나 힘의 한계를 느끼고
외직을 자청하여 3도의 태수를 역임하기도 했다.
진골 귀족이 그의 사회 개혁 안이 반영되지 않자 관직을 버리고 쌍계사 해인사 등에 발자취를 남긴 흔적이 있지만 마지막 행적은 보이지 않고 신선이되었다는 전설 만 전해 질 뿐이다.
경북의성군 단촌면 구계리 등운산에 머물면서 지금도 고색창연한 빛을 발하는 가운루와 우화루 라는 건축물을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세워 현세인들에게도 알려 지지않는 잔잔한 감동을 주고있다.
고운사입구 주차장에서 절까지는 소나무 굴참나무 고목이 터널을 이루고 1km 의 오솔길이 인상적이다.
경내에 들어서면 왼편에 작은 전각내에 현령 이용준의 공덕비가 보이고 조금 지나면 개울 물이 흐르고 있는 암반에 기둥을 세우고 가로로 누각을 얹어 지형지물을 훼손하지 않고 정면5간 측면3간의 누각을 절묘하게 연출한 격 조높은 풍경 그대로이다.
초서체 현판은 공민왕이 썼다 한다.
우화루 역시 최치원이 지었다고하는데 2층 으로 건축의 튼실한 모양과 고색 창연한 빛을 발하고있다.
등운산은 영천의 보현산에서 갈라져 북쪽으로 뻗어나와 갈라산으로 올라 갔다가 등운산을 만들고 높지않지만 그품에 신라시대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있다.
산은 보잘것없으나 인간의 조형물은 볼만하다.
유일한 보물급으로 석조여래좌상이 있는데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광배의 불꽃무늬 조각과 작으면서도 장방형 체구의 의연함을 보여주는 볼만하고, 연수전의 화려한 치장을볼 만하다.
그리고 이절에는 스님들이 직접 염불을 하고 용맹정진하는 모습을 볼수있고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않아 호젖한 기분을 맞 볼수있다.
浮 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