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 성주 편
대상 공 황석주
高麗文臣 대상공파 창원 황씨 시조 양충모의 삼세 손으로 벼슬이 上柱國에 이르렀다 상주 星州 황씨시조이다.
문헌: 典故大方 大相公派 창원 황씨 족보 상주 황씨 족보 성주 황씨 족보
議政府 左贊成 양평군 황효원
1417년 태종 17년 정유년~ 1481년 성종 12년 신축년
조선 문신 자는 자영 후는 소원 본관은 상주 정자 사관의 아들이다
세 살 때에 부상을 당하고 偏母膝下에서 어머니의 뜻에 순종하고 몸가짐이 단정 하였으며 학업에 정진 하였다.
1444년 세종 26년 각자 년에 式年文科에 장원 하여 禮賓寺 主簿를 거쳐 文宗朝에 禮曹佐郞 司諫院 獻納 등을 역임하고 1453년 단종 몇 년 계유년에 吏曹正郞 겸 議政府 檢詳을 거쳐 그 이듬해에 議政府 舍人이 되었다 1455년 世祖 5년을해년에 司僕寺尹 보문각 知製敎 가 되었으며 이예 左翼三等功臣이되어 吏曹參議에 昇進하고
1457년 세조 3년 정축년의 工曹참판으로 聖節兼 春秋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商山郡에 封하여 졌으며 이듬해에 司憲府의 大司憲을 거쳐 吏曹參判. 忠淸道觀察黜陟使를 역임하고 1459년 세종 5년 김해 5년에 경기도관찰사 겸 개성 유수가 이었다가 히든힐 漢城府判尹에 올랐다.
1462년 세조 8년 임오년 刑曹判書 兼 鑄鐘提擧監이 되어 鍾 酒造를 監督 하였고 ,吏曹判書 世子侍講院 左賓客을 거쳐 1469년 예종 원년 기축년에 議政府 左贊成 兼 判義禁府事에 이르렀다.
시호는 양평이다.
공은 성품이 亮直 하고 忠良하여 공을 위하여는 사을 돌보지 않고 一心奉仕 하였으므로 역대 군왕의 寵愛를 받았고 淸白吏考에 기록되어 있으며 世宗朝에서 현 普信閣鐘 鑄造 할때 주종제거감이 되어 그 임무를 다 하였으므로 그 종 표면에 공의 官爵과 성명이 주기 되어 있다
공이 자손을 훈계한 시 3장이 있다.
1. 角弓飜反垂戒詩歌
길들여 손에 익은 활도 조심하여 간직하라. 한번 활줄 벗겨지면 뒤집히고 돌아가리.! 이 일을 거울삼아 자손에게 이르노니 시가에 담은 나이 뜻 뼈에 새겨 간직 코녀!
2. 傳服同案兄弟匪他
형제란 어릴 때의 옷은 내리 전해입고, 한자리 잠, 한솥밥 의좋게 자랐으라. 한 핏줄로 맺은 형제 대대로 이어 받았으니 끊는다고 끊어지고 가른다고 갈라지랴.
3. 引老取荒古人如何
형제끼리 조심할 것 물 욕보다 큰 것 없다. 낮은 것은 내가 갖고 좋은 것은 형이나 아우 주라 예 사람이 하신 일을 내일도 본받아서 전지 자손 내려가며 물욕에서 떠나 고녀.
문헌 상주 황씨 족보 한국 인명대사전 세종 세 줘 성종실록 한국 고사 대전
장흥도호부사. 공 황세득
1537년 중종 32년 정묘년~ 1598년 선조 31년 무술년 조선 武臣 자는 仕求 본관은 星州 麗朝 大相 石柱의 後孫 이요 贈 左承旨 종식의 아들이다. 1564년 명종 19년 갑자년 10년 武科에 及第하여 宣傳官廳 宣傳官이 되었고 그 후로 누차승진 되어 長興都護府使에 이르렀다 1592년 선조 25년 임진년에 壬辰倭亂이 일어나자 蛇梁 僉節制使가 되어 統制使 李舜臣 휘하에서 이순신과 同心協力하여 해로 침공하는 왜적을 방어함에 있어 공이 선봉장이 되어 많은 공을 세웠는데 특히 碧波亭과 古今島 싸움에서 많은 왜적을 殺戮하고 殊勳을 세웠다. 공은 이순신과 사촌 동서로 이순신이 공의 충의와 용력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항시 공에게 말하기를 輕敵 하지 말고 항상 경계하라.고 당부하였다 적과 싸워서 連戰連勝 하던 중 1593년 선조 26년 계사년 9월 閑山島에 본영을 옮겼다. 1598년 선조 31년 무술년 9월의 명나라 援軍 陳璘 提督이 인솔한 병력 15000과 우리 수군이 합세하여 그해 10월에 왜적을 曳橋 북쪽에서 공격할 때 공이 이순신 艦隊의 선봉으로 많은 왜적을 사살하고 추격하다가 적의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전사 직후에 여러 장수들이 이순신에게 조문을 드리니 이순신이 말하기를 세력은 나라를 위하여 죽으니 참으로 영광된 죽음이다. 라고 하였다 .
전사후 조정에서 戶曹參判을 追贈하고 숙종 조에 와서는
고향인 稷山에 정문을 세우고 丙子胡亂에 전사한 공의 아들 珀과 함께 祭享 한다.
陳中時 一節
閑山島 月明夜 獨기板屋船頭手무尺우
心懷萬두深愁何處 一聲長笛 使添愁
문헌: 직산읍지 삼각로 상주 황씨 족보 한국 인명대사전
司憲府 大司憲 동상 공 황우한
1541년 중종 36년 신축년~ 1606년 선조 39년 병오년
조선 문신 자는 유충 호는 동산 본관은 상주
左贊成 효원의 4대 손이요 증이조참판 세근의 아들이다.
일찌기 생원시에 급제하고 1574년 선조 7년 갑술년에 10시 문과 병과로 급제 하였다. 1580년 선조 13년 경진 년에 司諫院 獻納이 되고 戶曹정랑, 熙川 郡守, 成均館 司藝를 거쳐 1589년 선조 22년 기축년 承政院 左副承旨가 되었다.
1594년 선조 27년 갑오년 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경기도 觀察使가 되고 1596년 선조 29년 병신년 漢城府 左尹이 되고, 이듬해에 開城府 留守가 되었다. 1599년 선조 32년 기해년의 弘文館 副提學을 거쳐 同知義禁府事가 되고 이듬해에 同知中樞府事가 되었다가 이듬해에 江原道 觀察使가 되었으며 1605년 선조 38년 4년에 戶曹參判이되고 司饔院 提調를 겸하였다.
1606년 선조 39년 병인년 司憲府大司憲에 임명되어 재임중에 逝去하였다.
문 헌: 선조실록 국조인물고 한국 인명대사전 상주 황씨 족보
세자시강원 찬선 염헌공 황우상
1554년 명종 9년 갑인년~ 1620년 광해군 12년 경신년
조선 문신 자는 여상 호는 염헌 상주 左贊成 효원의 4대 손이요. 영흥 판관 세은의 아들로서, 태어나서 두 달만에 모친께서 서거하고 계모를 맞이하였는데 그 자정과 효심이 생모 생자와 다를 바 없었다.
공은 어려서부터 용모가 단아 하고 재질이 총명하여 보는 사람마다 장래에 촉망이 컸다, 공이 13세에 부친 마저 서거 하자. 상제의 初終凡節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다. 양친을 사별하고 가세가 매우 빈한 하였으나
이를 극복하고 학업에 정진하여 성장함에 이르러서는 학문이 대성하였다.
1594년 선조 27년 갑오년 孝廉篤學이 조정에 알려 져서 사직서 參奉이 되고, 翊衞司 翊贊이 되고 1597년 선조 30년 정유년에 德山 縣監이 되어 선정을 베풀어 지방 교화와 난민 救恤에 힘쓰면서 항상 말하기를 사람은 恬珀靜肅하고 自制하며 簡潔하고 諸般 政事를 처리하는데 있어 道理와 名分에 어긋나지 아니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임기가 다 되자, 世子侍講院 贊善이 되었으나 이를 사임하고 돌아와 부모의 묘하에 집을 짓고 살면서 그 집을 廉軒 이라고 自號 하였다.
左承旨에 追贈되었다.
문 헌: 상주 황씨 족보
戶曹參議 일심재 공 황인
조선 문신 자는 백인 호는 일심재 본관은 우주 문숙공 거정의 7세 손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16세 때에 절에 들어가 글 공부를 하였는데, 정여립이 그 절에 관광차 왔다가 한번 만나보기를 청하였으나, 공이 거절하니 곁에 있던 사람들이 그 연유를 물은지라, 공이 대답하기를 그가 사람됨이 陰凶하여 후일 어떤 일을 범 할는지 예측하기가 어려운 사람이니 만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그 후 정여립의 謀反事件이 일어나자 사람들은 그 先見之明에 감탄하였다, 학문은 중용의 天性之篇 연구에 정진하였다. 19세에 司馬試에 합격하고 23세에 太學관에 진학하고 정암 조광조, 회재 이언적, 규암 송인수의 묘지를 찬 하였다. 48세의 벼슬이 戶曹參議에 이르렀으나 그 이듬해에 사임하고 고향에 돌아와 精舍를 짓고 그 이름을
一心齊라 하고 시 한 수를 읊었는데 그 시에
爲國 忠心一이오. 居家道理三이라.
知非四十九하니 吾以名吾身이라
문헌: 성주 황씨 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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