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지중추부사 제곡 공 황세정
1612년 광해군 4년 임자년~ 1705년 숙종 31년을유년 조선 문신 자는 주경 호는 제곡 회천군 윤보의 후손 이요 사예 덕윤의 아들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영특함이 凡兒와는 특이하였다.
여섯 살 때 동춘 宋浚吉 이게 수학 하였는데 1년에 十九史를 다 읽으니 동춘 宋浚吉이 칭찬하기를 대단히 재주가 있는 아이다라고 하였다.
아홉 살 때에 지천 崔鳴吉에게 가서 강북 三綱五倫을 강의 할 때의 몸가짐이 금연하기가 성숙한사람 같으니 遲川 최명길이 말하기를 장차 큰 그릇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때 마침 청나라 사신이 와서 娛樂場을 설치하고 興行을 하게되니 幼老가 앞을 다투어 놀러 나갔다 그러나 공은 홀로 못 본 듯이 조용히 앉아 독서만 하고 있으니 사람마다 이상이 여기었다. 12살이 될 때부터 동춘송중길 문하에서 학업에 전심 하게 되었는데 스승의 곁을 떠나지 않고 새벽부터 밤에 이렇게까지 性理學을 전공하여 동춘 송준길의 首弟子가 되었고 四傑 중에 한 사람이 되었다.
우암 宋時烈과 동춘 송준길이 같은 마을에 살면서 도학을 강론 함으로 공은 두 선생에 師事를 하였다.
1656년 효종 7년년에 英陵 參奉과 童蒙敎官에 任命되었으나 就任하지 아니하였는데 1659 효종10년에 다시 동봉 교관으로 임명되자 노모로 부터 수락을 강권함으로 할 수 없이 취임하였다. 당시 左相으로 있는 閔鼎重이 그의 아들을 공에게 보내어 수학 케하자 學徒들이 雲集하므로 공이 성의를 다하여 교수하니 많은 英才가 배출되었다.
공은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燕岐의 亭舍를 構築하고 학문에 전력하고 있었더니 우암 송시열이 霽谷幽居 네 글자를 써서 보내 왔기에 이로부터 自號를 제곡霽谷이라 하였다.
1659년 효종 10년 기해년 慈懿大妃 服喪 문제로 우암 송시열과 동춘 송준길 두 선생님이 남인으로부터 모략을 받아오다가 1675년 숙종 원년 을묘년 2차 禮訟이 일어나자 우암송시열은 德源으로 流配되었고 이미 죽은 동춘 송중길은 前職이 追削 되자 공은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두 선생의 寃痛한 사실과 尹儶의 凶謀를 규탄하는 죄상을 상소 하였다가 珍島로 流配되었다 1680년 숙종 6년 경신년에 庚申大黜陟 때에 竄地에서 풀려나 義盈庫 主簿를 거쳐 工曹佐郞에 취임, 善政을 베풀어 民頌이 자자하였다.
1689년 숙종 15년 을사년에 南人들이 다시 政權을 잡게 되자 우암 宋時烈이 濟州島에 移配되어 賜死 되자 공이 憤慨하여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학문에 全心하였다. 1694년 숙종 20년 갑술년 宗廟誓令이 되어 朝會에 나가니 少論의 영수 朴世采가 공을 보고 국사를 의논하려고 하였으나이를 사양하고 귀향하였다.
가을의 공의 제자인 中樞副使 閔鎭長 등이 임금에게 글을 올리기를 黃世禎은 국가의 功勳이 많으니 특히 俸祿을 내리는 것이 妥當하다. 고 하여 通政大夫 僉知中樞府事에 任命되이 이때 공의 나이 78 세웠다
201년 숙종 27년 신사년에 金昌集의 薦擧로 가선대부에 同知中樞府事가 되었다.
1705년 숙종 31년 을유년 2월 23일에 서거하니 향년 84세였다. 儒賢考의 올랐다.
문헌: 숙종실록 약파 말록 회덕 황씨 족보 한국 인명대사전
학자 소재 선생 黃世龍
1630년 인조 8년 경오년~ 1691년 숙종 17년 신미년 朝鮮學者 자는 國賓 號는 소재 懷川君 允寶의 後孫이며
通情大夫 載亨의 아들이다.
1630년 인조 8년 경오년 10월 18일에 懷仁江 外面 新興里에서 出生했다.
어려서부터 才質이 英特하고 性品이 介潔을 하였다 .
孝敬을 能讀하고 禮儀를 갖추어 父母를 섬김에 孝誠을 지극히 하고 벗을 사귐에 謙讓과 圓滿을 첫째로 삼았다.
15세에 四書三經을 讀破하여 大儒의 風貌를 갖추었다.
날이 갈수록 國政이 당파에 의하여 좌우되며 심하여 치자 부친께서 항상 時局을 우려 하므로 공은 出仕를 斷念하고 鄕里에서 行修와 학문에 全力하는 한편 課業과 育英의 힘썼다. 공은 효와 友愛에 지극하여 부모에게 조석으로 問候 하는 절차를 하루도 게을리하지 아니하였다.
1651년 효종 2년 신묘년 4월에 부친의 병환이 위독 하자 斷指 하여 주혈하니 회생 하였다. 그 후 부친이 逝去 하니 喪制는 朱子家禮를 준수하고 廬墓三年에 孝誠을 다하여 1675년 숙종 원년 을묘년 11월 3일에 母親喪을 당하여 수도 初終凡節을 父喪때와 같이 하였다.
그 후 養老齋와 執義齋를 설치하여 父老들을 慰勞하고 靑少年을 교육 하니 一鄕이 和樂하였다.
공의 과거에 응시할 것을 권하는 사람이 있으면 병을 憑藉하고 듣지 아니하고 도학과 詠詩 로서 일생을 마쳤는데 조정에서 공의 덕행을 가상히 여기어 嘉善大夫에 贈爵 하였다.
문헌 회덕황씨 족보
학자 수우재 선생 황식
1647년 인조 25년 정해년~ 1712년 숙종 38년 임진년
조선 학자 자는 자상 號는 守愚齋 功曹參議 수량의 증손 민중의 아들이다.
어려서 선생의 조부에게서 수학 하였는데 재질이 총명하고 과업에 근면 하여 장성 함에 이르러서는 학업이 대성 하였으나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않고 江戶에서 悠悠自適 하면서 經史探究에 專念 하였는데 특히 易學硏究에 力點을 두어 易說 1편을 著述하고 또 葬禮 법에 일원화를 절감하여 葬法新編을 編纂 하였으며 蒙學指南 訓蒙要語 心學統宗 祭禮節要 등 많은 實用學을 편집하였다. 저서로서 수우제 집 12권이 있다
문헌 회덕 황씨 족보
진주 목사 공 황찬
1677년 숙종 3년 정사년~ 1729년 영조 5년 기유년 자는 휘경 회천군 윤보의 13대 손이요. 윤후의 아들이다.
1702년 숙종 28년 임원에 式年文科 병과로 급제하여 景陽道 察訪을 거쳐 1705년 숙종 31년 을유년에 成均館 典籍이 되고 이듬해에 司憲府監察로 임하였다가 1707년 숙종 33년 정해년에 求禮 縣監이 되었다 1717년 숙종 43년 정유년에 固城 縣監이 되고 이어 禮曹佐郞을 거쳐 藝文館 奉敎가 되었다가 이듬해에 梁山郡守가 되었는데 그 해 凶年이 들어 국민이 거의가 飢餓狀態에 있었으므로 공은 자기 봉급을 틀어서 군민을 구제 하니 地方白과 御使가 임금에게 上訴하여 공을 승진시켜 주려 하였으나 공이 굳이 사 양하고 5년 동안을 그곳 군수직을 맡고 있다가 친환으로 관직을 사퇴하고 귀 향하였다.
그 후 군민등이 비를 세워 공의 治績을 追思 하였다.
1723년 경종 3년 계묘년 晋州牧使가 되었으나 공이 평소부터 風痰이 있었는데 그 병이 더 심해져서 집무를 할 수 없게 되자 고향의 다시 돌아 갔다가 1726년 영조 2년 병오년 順天牧使로 赴任 하였으나 10개월 만에 辭退하고 고향에 들어가 宿患을 치료하다가 1729년 영조 5년 을유년에 逝去하였다.
공은 성격이 강직하고 緻密하며 行義가 단정하여 일에 대소를 막론하고 소홀히 다루지 아니하였다. 효로서 부모를 봉양하다고 성으로서 제사를 받들며 친족 간의 敦睦에 힘쓰고 모든 사람에게 의리로 접응 하니 일향이 다 道德君子라고 칭송이 자자하였다
문헌 회덕 황씨 족보
효자 황재연 선생
1441년 세종 23년 신유년~ 1503년 연산군 9년 계해년
효자 회천군 윤보 7세 손이며 漢城判尹 종식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容貌가 淸秀하고 才質이 비범하였다. 단종이 즉위 하자 단종이 선생을 진사에 임명하고 불러서 말하기를 경은 자질이 비상하고 나이도 나와 동갑이니 훗날에 重用될 것이다고 하였다 .
조부 浩가 公州判官으로 있을 때 端宗이 왕위에서 逐出되고 世祖가 즉 위 하자 錦城大君과 함께 政局改革을 하다가 事前에 발각되어 逆謀로 몰려 피살되자 선생의 아버지 종식이 벼슬을 버리고, 淸州 남쪽에 가서 조부의 신위를 모시게 되므로 부친을 따라서 그곳으로 갔다. 선생은 부명으로 환로에는 나가지 아니 하고 향리에서 농업에 종사하는서 학문에 정진하였다 부모가 있으면서 가세가 빈약한 사람이 선생에게 수학을 원하는 자가 있으면 선생은 말하기를 부모 봉양을 극진히 한 연 후에 여력이 있으면 학문을 닦으라 하였다.
또 벼슬에 나갈 것을 권하는 사람이 있으면 선생은 대답하기를 이몸이 세상에서 삶을 亨有하는 것은 부모님께서 狗勞한 遺體인데 성의껏 부모를 섬기는 것이 사람의 도리이다 .
더욱이 나의 부친께서는 端宗의 臣下이지 世祖의 臣下가 아니다. 고 말하고 또한 내 어버이 정신과 명령을 거역하고 타인의 권함을 따르겠는가 고 하였다.
1448년 성종 19년 갑신년의 父喪을 당하며 상례를 엄수하고 3년동안 죽을 먹으면서 잠시도 상복을 벗지 아니하였며 1491년 성종 22년 신해년 모친상을 당해서도 부상시와 같이 하였다.
누가 선생에게 말하기를 나이 50이면 이미 노경인데 과도히 애통하여 기실을 상하게 되면 오히려 효로서 효를 상하는 것이 아니냐고 하는,지라 선생은 말하기를 居喪하는 자 珍羞盛饌에 호탕한 생활이 어찌 지대한 부모의 은혜를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런 것은 모두 人倫之悖道라고 하였다.
선생의 행수가 이와 같은이 날로 다른 제자가 더 하였다.
문헌 회덕황씨 족보
효자 황현 선생
1611년 광해군 4년 신해년~ 서거 연도 미상, 효자 호는 일성 윤보의 15세 손이다
어려서부터 재질이 총명하고 효성이 지극하여 晝耕夜讀을 하면서 부모 奉養에 조금도 疎忽함이 없었다 부친께서 疾患으로 수년 동안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되자 매일 밤 北斗七星에 기도를 드리기를 하루도 게을리 함이 없었다. 부친의 臨終 때에는 斷指輸血을 하여 몇 달을 더 연수 하였고 居喪에는 侍墓 3년을 하루도 거른 날이 없었다. 너무 애통한 나머지 失明 하였는데 終祭날에 忽然히 다시 앞을 보게 되자 마을 사람들이 말하기를 효성이 지극하여 하늘이 감동함이다. 라고 하였다.
모친상을 당하자 부상시와 같이 상제의 극진한 성의을 다하였다. 선생이 서거한 후 향리 사람들이 선생님의 묘입구에 비를 세워 효자 묘라 旌慓 하였다.
문헌 회덕 황씨 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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