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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조목종

팔봉사 삼현 황포 황명세 황자후선생 .황익훈,황석진. 황로술 황태문

八 峰寺  三賢 黃褒 黃名世  黃自厚선생 


1, 황포 선생

 朝鮮學者 본관은 紆州 文肅公  四佳齊   居中의 6대손이다. 선조 때 학자로서 學文과 德行을 出衆하여 조정해서 벼슬에 오르기를  누차 권하였으나.

 이에 응 하지 않고 있었는데 1592년 선조 25년 임진년에 壬辰倭亂이 일어나자 召募使 李廷鸞이 그의 아들  道吉을 보내어 倭敵討伐에 대한 方策을 問議하는 동시에  義兵倡起를 권함으로 선생님 이때 居喪中인 관계로 조카인 裳吉로 하여금 義兵 수백명을  모집케 하여  出戰 하였다가 高山 戰鬪에서 殉國하였다 그후 조정해서 司僕寺에  贈爵 되었다.

2. 황명세 선생

 名世는 褒이 아들로서 일찍이 司馬試에 등과 하였는데 당시의 試官 愼天翔의 선생의 글을 보고 李太白 시에 王羲之의 글씨다라고  推奬한 바 있다.

 1636년 인조 14년 병자년에 丙子胡亂이 일어나자 壯丁 수 100명과 군기 수천을 10척의 선박에 나누어 싣고 江華島로 가는 도중 安養에 이르러 和戰는 소식을 듣고 痛哭하면서 故鄕에 돌아와  讀門自靖하였다.

 司憲府執義  증작 되었다.

3. 황자후 선생

 자후는 명세의 아들로서  進士에 及第하고 사계 김장생 신재 周世鵬에 사사하여 학문이 대성 하니 당시 名賢들의 推奬을 받았다.

 三賢 선생님은 3대를 계승하여 명망을 떨치는 분으로서 일찍이 益山 花山書院에  추배 되고 그 후 八峯山밑 八峯詞 享祀 한다.

문헌 우주 황씨 족보


 동지중추부사 황익훈

   1791년 정조 15년 신해년~ 서거 연도 미상 조선 무신 자는 희찬 본관은 우주 문숙공 거중의 후손이다.

 어려서부터 骨格이 長大하고 기상이 軒昻하여 群兒와 더불어  遊戱를 함에 있어  規律이 嚴正하고  賞罰이 분명하여 統率을 잘 하였다.   學文을 좋아하여 백과 제서를 즐겨 읽되 특히 孫, 吳兵書를 精讀하는 한편 武藝 鍛鍊에 힘썼다.

 무과에 급제하여 宣傳官이 되고 훈련은 주부, 판관 五衛都摠府  經歷 등을 歷任하였다 황해도  兵馬虞侯使 로서 討捕使가  되니 도적의 무리들이 공의 武勇의 위협 되어 경내가 平溫 하였다 임기를 마치고 折衝將軍 龍陽衛 副護軍이 되었다가 同知中樞府事에  이르렸다.

 문헌 우주 황씨 족보.


 학자 정재 선생  황석진

 1799년 정조 23년 기미년~  1865년 고종 2년 을축년 학자 본관은 우주 자는 성의  호는 정재 문숙공 居中의 후손 이요  萬垢의 아들로서 유시로부터  용모가 단정하고 재질이 출중하여 12세에 부친상을 당하여 3년 여묘으로 효성을 다 하였다.

 그 후 權松泉을 찾아가 앞으로 나아갈 길을 물은즉 권송천이 말하기를 사람은 학문을 배워야 正道를 행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권학을 하는지라 선생은 이에 답하기를 가세가 비난하여 노모 봉양  때문에 학문 배울 여가가 없다고 하니 권송천이  다시말하기를 옛적에 군자도   밭을갈며  글를 배워  성공한 예가 적지 않다. 成功이란 성의가 있고 없는 것이 문제이지 환경과 사정이 여하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면서 간곡히 권하였다.

 선생은 집에 돌아와 그 말을 모친에게 하였더니 모친이 혼연히 기뻐하면서 권학 하였다.

 1818년 순조 18년 무인년에  처음으로 宋穉圭에게서 擊蒙要訣을 배우는데 문자 그대로 晝耕夜讀을 하면서 人生間不讀書면  無以免墻面之患의14 자로 座右銘을 삼고 사서와 六經을 講讀하고 또 朱書節要도  熟讀하여 심성과이기에 대한 설을 잘  解得 하였으며  格致 誠正 修齊 治平 道里를 通達하고  自警文 12조를 시어서 평생 신조로 삼았다. 穉어릴치

 1838년 헌종 4년 무술년에 강재 송치규가 서거한 뒤로는 독학으로 성,도,교에 대하여 연마 하였으며 1847년 헌종 13년 정미년에  매산 홍직필에게 가서 성,도, 교에  대한 강설을 들었다.  선생이 저작한 문 집중해 明德心性情之說,性道敎人物之說, 鳶飛漁躍說, 鬼屈神伸說,靜存動察說.  未發旣發說. 등이 있다.

 선생은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학문을 성공하면 반드시 勤勉함과 誠意 있다고 하였다 선생은  龜巖遺稿4권이  중년의 遺失된 어떤 것을 收拾하여 상하권으로 출판하였다.

 1856년 철종 7년 영진 연예 우주황씨  修補시에 선생이 都廳이 되어서 嫡庶의 分別을 廢止하였다 .

 문헌 우주 황씨 족보

 

敦寧府 도정 주은 공 황로술

 1808년 순조 팔년 무진년~  1890년 고종 27년 경인년 학자 자는 은서 호는주은 본관은 우주 문숙공 거중의 후손 이요. 언모의 아들이다

  선생은 성품이 寬厚하고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여 형제간의 우애가 남달리 두터웠었으며 친척간에 돈목 하고 처세함에 덕행으로 하는데 1834년 순조  34년 갑오년의 음성으로 司憲府監察 되고 그 후 숙종 조회 용양위부호군, 敦寧府 都正을 역임한 후 관직을 사퇴하고 고향의 내려와  學塾을 건립하고 후진    육영에 많은 힘을 썼다.

 조헌,  김 집, 도선생의 문묘  추배를 논의할 때에 선생님 유림 대표로서 임금에게 글을 올려 1874년 고종 11년 갑술년에 그 실현을 보았다.

 봉암 서원이 철폐될 때  선생의 종제  희태과 협력하여 본원 위토 140여두락 을  당지  문묘에 기부하였다.

 1887년 고종 24년 정현 연애 嘉善大夫 戶曹參判에 임명되었으나 나이 많아 취임하지 아니 하였다.

 문 헌:  우주황씨 족보


 황씨 중앙종친회 회장 黃泰汶 선생 1903년 계묘년~ 1972년 임자년  사업가 본관은 宇宙 고려 중윤 민보 후손으로 전북 옥구군에서 출생하였다.

 농가의 아들로서 태어난 선생은 漢文書塾에서 공부 하다가 18세 때에 4년제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다시 독학으로 공부하여 敎員 시험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요원으로 나가지 않고 群山市에 토매가리 정미소를 경영 한지 불과 수년의 지방 土豪가 되었다.  사업의욕이 왕성한 선생은 精米所 경영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당시 미곡의 집산지인 군산에서 米豆에 착수한 것이 실패의 원인이 되어 수년 동안 각고 근면 저축한 재산이 一敗塗地가 되었다. 

선생은 다시 全州로 進出하여 全北日報에 入社하여 기자 생활을 하다가 1933년 30세 되던 해에 토지 매매 소개업을 약간의 자본금을 만들어 가지고 平澤에 가서 상당 규모의  개간 사업을 경영하다가 鑛業계에 진출하게 되었다.

평북 寧越에서 金鑛 採掘에 착수하였으나 失敗하였다. 그 후 滿洲에 가서 선만 무역 공사를 창설하고  중일 사변관계로  품귀된 甘草상을 하게 되었는데  경기가 좋아서 奉天, 張家口, 청도 둥지에  지점을 설치하는 한편  북표에  6,000여 정보에 달하는 藥草栽培 農場을 경영하고 장가구에 있는 甘草 精液 공장, 淸道에는  아교 공장 등을 운영하면서 군에 납품도 하여 그의 재산을 조성하게 되었다.

 1945년 8.15 解放이 되자 滿洲 각지에 있는 많은 財産을 버리고 고향의 돌아와 韓藥상을 경영하게 되었다.  이예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한국의 信託統治가  의결되자 국내에 贊反兩論으로 政局과 財界가 대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同志들과 더불어 경제 混亂을 收拾하고 위하여 大韓商工會議所를 創設하고  선생은 企劃分科 委員長이 되어  한국 商工業界를 지도하면서  信託統治反對運動에 앞장서 투쟁하였다 또한 全國 事業家 大會를 召集하여 대회의 대표가 되었는데 이 대회가 후일 臨時政府 樹立 對策 協議 會議 母體가 되었다.

 이어 한국 初代 財務長官 金度演과 提携하여 대한 貿易協會를 組織하여 海外市場 開拓에  産婆役할을 하였고 韓國 獨立 政府樹立 對策委員會 財政 委員長으로 있으면서 三相會議 信託統治 決議案의  排斥運動과 蘇聯 代表 스티코프 逐出 運動에 앞장서 活躍하였다. 그 후 韓國 問題를 유엔의 상정시켜 한국에서 選擧가 가능한 地域의 選擧를 실시할 政策을 決定하는데 적극 참여하는 한편 고향에 있는 각급 敎育機關의 많은 敎育 基金을 지급하여 育英事業에 힘썼다.

 또 海外로부터 歸國하는 많은 同抱들에게  食量과 衣服을 나누어 주고 살 터를 마련해주기도 하였다. 그 후 廣德商會,  泰興鑛業 株式會社. 全國經濟人聯合會의 代表理事 등을 歷任하였다 1963년 黃氏 中央宗親會를 創立하고  初代回章에 選出되어 10년 동안 宗親의 發展과 運營에 積極 活動하였다.


 孝子 黃彬 先生


 1655년 효종 6년 을미년~ 1713년 숙종 39년  계사년  본관 우주  문숙공  居中의 후손이며  五衛將 一淸의 아들로서 容貌가 단정하며 성격이 온후하며 학문의 근면하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부친의 병세가 위독하여 지자  그 분액을 맛보고   醫員에게 病을 의논하여  약을 썼으며, 병이 위독할 때에는 斷指수혈을 하여 壽命을 延長케 하였다.

 父喪을 당하여 靈柩를 奉安한 殯所에 火災가 났었는데  火勢가 급하여 사람이  가까이 할 수 없는데도 선생은 火焰속에 뛰어들어가 靈柩를 안고  呼天痛哭  하니 바람은 자고 鎭火 되었다.

 이때에 이것을 본 사람들이 말하기를 天地神明의 도움이다라고 하였다 儒林에서 褒彰 할 것을 건너 하여 朝廷해서 褒賞하여 通德郞이 되었다.

 문선 우주 황씨 족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