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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조목종

황학.황용갑. 황익룡. 황섭.황 덕운 여사.황종익.황민달




孝子 聾瞽堂 先生  黃學

 1670년 숙종 16년 경오년~  1768년 영조 44년 무자년 효자 자는  백후  호는 농고당  본관 창원  고려 문하시랑 동중서 문하평장사 회원 부원군 석기의 후손 이요. 이창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才質이 聰明하며 학업을 좋아하였다 장성함에 이르러서는 經史를 博覽하고  孝誠이 至極하여 鄕里 사람들이 隱德君子라고 일컬었다.

 1720년 숙종 26년 병자년에 母親喪을 당하자 죽과 물만 먹고 연명 하면서 3년 동안 喪禮를 嚴守 하였다.  1737년 영조 13년 계사년에 부친께서 병환이 위독 하자 똥을 맛 보며 하늘에 祈禱하고 藥湯器에 至誠을 다 하였으나 그해 겨울에 父喪을 당하게 되자 여묘 3년을 마친 후에도 朝夕으로 호곡하고 매일  省墓 하되  風雨을 가리지 않았다.

마을 앞에 石川이 있고 석천 위에 논이 있는데 선생의 부친이 살아 계실적에 잉어 때가 항상 群集 함으로 그 잉어를 잡아다가 奉親 하였는데 부친이 逝去한 후로는 그 잉어가 저절로 없어지니 그 고장 사람들이 그 논을 잉어 담이라고 불렀고 선생의 양친위일이 같은 날인데 父親이 살아 계실 때에 꿩구이를 즐겼음으로 그날은 반드시   꿩을  구워  제전에 供用 하여 왔는데. 어느 해에는 눈이 많이 와서 꿩구할 도리가 없어 걱정하고 있는데 문득 꿩한 마리가 집안에 날아 들어왔다.그 꿩을 잡아 제사에 쓰게 되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봉친에 잉어와 제전에 꿩은 효에 감동한 연유라 하니 선생은 우연한 일이다. 라고 하였다. 선생은 부모를 追慕하는 懇切한 정성에 孝烏詩 지었는데 그 시에 辭意가 너무 간절하여  사람의 肺腑를 찌르는 듯 하였다. 선생은 일찍부터 과거는 단념하고 부모 묘하에 書室을 構築하고 貞淑한 자세와 단정한 行修로서  학문에 힘쓰면서 세태에 混濁함을 慨嘆하며 말하기를 귀로는 듣지 않고 눈으로는 보지 않는다고 하여 書堂에 이름을 농고라 하고 자호를 농고당이라 하였다. 향리 사람들이 선생의 德行을 관에 보고 하려 하면 일을 굳이 물리쳤고 또는 邑誌에 기록하려 하면 일을 끝내 拒絶하였다.

 선생은 가람 李玄逸과  제산 金聖鐸의 文人으로서 김성탁이 蟾津 適所에 있을 적에 虼峰이빈망  이봉 황후간 등과 함께 경학에 대한 講論을 한 일이 있었다.

 선생이 逝去 100년 후에 본도 유생들의 奏請으로 旌閭가 세워졌다.

문 헌: 농구 당직


 孝子 와암 선생 黃龍甲

 1762년 영조 38년 임오년~ 1822년 순조 22년  임오년  효자  자는 운선 홍어는 와 암 본관 창문 고려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회산 부원군 석기 후손이요, 왕대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가세가  빈한하였지만  부모 奉養에 甘味를 떨구는 일이 없었으며  부친의 疾患이 심하여 치자 天地神明에게 빌어 效驗을 보기도 하였다. 설한풍에 醫員을 찾아 갈 때에는 호랑이가 앞길을 인도하여 주었으며, 의원 집에 사나운 개가 있어 다른 사람들은 접근을 못하였지만 선생이 가면 꼬리를 흔들면서 맞아주니 이 사실을 보는 사람들은  기이하게 여겼다.

 모친께서 病患으로 앓게되자 선생은 자기의 허벅다리 살을 칼로 베어 약으로 드리기를 3번의 병이 완쾌 하였다. 居喪에는 哀痛을 極盡이 하니, 鄕道 儒生이  累次呈狀하여 1901년 광무 5년 신축년에 저장해서 정려을 세웠다

 문헌 창원 황씨 족보


 孝子 학암 선생 黃翼龍

 孝子 자는 能見 호는 鶴庵 만포  본관 창문 고려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회산 부원군 석기의 후손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가정은 비록 빈한 하였으나 부모봉양에 감미를 떨군 일이 없었다. 선생의 아버지가 만년에  질환 있어  선생님 멀리 가서 약을 묻고 돌아오는데 마침 깊은 산길에 당도하자 날이 저물어 지척을 분간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 때 어떤 불빛이 앞을 비추어 주어 집까지 무사히 돌아왔는데 그때 여러 의원들이 하는 말이 그 약은 아무 곳에나 있는 것이 약이 되는 것이 아니라 명산에 있는 것이 라야 靈效를 볼 것이다라고 말했다

어느날 약을 찾아 깊은 산에 들어가 약을 키워 가지고 깊은 산골짜기에서 채 나오기 전에 날이  저물어 寸步을 걸을 수가 없었다. 이때 문득 숲속에서 큰 범을 만나 피할 수 없게 되자 범에게 그 사정을 말 하였더니 범은 사람을 해치지 않고 불빛을 비춰 주면서 따라 옴으로 그 불빛에 힘입어 마을에 이르러 보니 마을 밖까지 나와서 기다리고 있던 집사람 들이 그 광경을 보고 모두 놀랐다. 이때 범은 감쪽같이 어디론가 가버렸다.  이야기를들은 사람들은 모두 말하기를 범이 선생의 효성에 감동되어 그렇게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약이 효력이 있어 선생을 아버지 병환은 治癒되었다.

 부상을 당하여  初終凡節과 3년 廬墓에  지성을 다 하였다.

 嘉善大夫 刑曹參議에 追增되었다.  士林들의  추증으로 정문이 세워졌다 

 문헌 창원 황씨 족보 이산문집


  孝子 永慕堂 선생  黃攝

 1767년 영조 43년  정해년~ 1838년 헌종 4년 무술년 효자  자는 이옥    호는  영모당 본관은 창원 고려문화 씨랑 동중서문하평장사 회산 부원군 석기의 후손이며 영채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出衆하여 부모를 섬김에 다른 사람의 미치지 못 할까 항상 걱정을 하며 정성을 다 하더니 1793년 정조 17년 계축년 봄에 부친이 眼疾을 앓아 거의 失明하게 되었다. 선생이 먼곳에 가서 약을구하여가지고 저물게 돌아오는데, 문득 앞에 호랑이가 나타났다. 이때 선생은 사정을 범에게 상세히 말한즉 범이 머리를 숙이고 선생의 뒤를 따라 오다가 집 가까이 와서는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그 후 다시 약을 구하여 가지고 오는 길에 또 그 봄을만나 집까지 같이 오게 되었으니 이런 공의 夜行을 보호 하기 위함이었다. 그해 겨울에 선생의 부친께서 배에 浮腫이 나서 위중 하였는데 강에 있는 생선을 먹고 싶다 하나 때는 엄동 설한이라 강에는 눈과 얼음이 얼어 붙어 있었다. 선생이 강가에 가서 얼음을 두들겨 깨니 월척의 잉어가 문득 뛰어 강위에 올라 왔다.  선생은 그 잉어를 가지고 집에 돌아와 회를 쳐서  부친께 드렸고,  또  메추리 구운 것을 청하기에 산에 가서 매추리 찾고 있는데 마침 그때 공중에 매가 나타나더니 매추리 한 마리를 떨어뜨렸다.

 그 메추리를 가져다가 구워 드렸으나 별 차효가 없으므로 지성을 다하여 天地神明에게 기도를 드렸더니 밤중에 非夢似夢간에 노인이 나타나 현몽 하기를 너는 이제의 도리를 다하니 이것을 주노라 그리고 너희 집에 靈草가 있는데 왜 쓰지 않는가, 하고 사라졌다.선생님 놀라 깨어보니 벼개 머리에 銀鍼 하나가 놓여 있었다. 밤이 밝기를 기다려 그 사유를 부부친께 고하고 하고 腹部痛處에 침을 놓았더니 많은 차도가 있었다.

 이때 土盆 중에 선생의 손으로 심은 백도라지 몇 그루가 있었는데 심은지가 오래돼서 藥效가 있을까 하여 다려 드렸더니 병이 快癒 되었다. 현몽의  영초라는 것이 이것을 말하였다. 1748년 영조 24년 무진년 父喪을 당하자 初終凡節에 지극히 喪禮를 엄수 하고 1752년 영조 28년 임신년 봄에  어머니가 老患으로 위중 하자 단지수혈를 하니 回生하여 몇 달을 더 살게 되었다. 母親喪을 당하자 父喪시와 조금도 다름없이 孝誠을 다하였다 선생님이 서거 후에 정문이 세워졌다 .

 문헌 이산집 창원황씨 족보

 

孝烈婦 黃 德運 女史 

 조선 효열부 본관 창원 참판 김종필 처다.어려서부터 정숙함이 출중하여 향리에서 禮讚을 받았다. 출가하여 媤父母를 섬김에 예절에 어긋남이 없게 하게  사람들이 모두  欽慕하였다.

  31세 때에 남편 김종필이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 돌아오지 않는이 여사는 정성을 다하여 天地神明의 泣血祈禱를 한지  십여일이 되자.   부군의 시체가  바닷가에 漂着 되었다.  여사는 곧 부군을 따라 죽으려 하였으나 노시모가 萬端說諭로서 막음으로 차마 殉義를 못하고 喪葬祭奠에 갖은 誠意를 다했다.

偏姑를 섬김에 있어  남편이 살아 있을 때와 못지않게 孝誠을 다 하였고 姑상을 당하여  여묘 3년에 효성을 다 하였다. 아들을 가르침에 효도가 우애를 힘써 가르치니 아들 김 홍석이 어머니의 敎訓을 잘 받아 어머니 섬김의 효성을 다하니 그 명성이 자자한였다 1925년 을축년의 全羅南道 士林으로부터  이사실이 成均館에 報達되자  慕聖孔會에서 讚揚文을 내리고  孝烈旌閭를 建立하였다.

 문헌 전라남도 도지


  孝子 황종익 선생

 효자 자는 주원 본관 창문 고려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회산 부원군  석기의 후손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출중하여 부모를 섬김에 있어 昏定晨省의 절차와 菽水에 奉養에 彈誠竭力하는 효성이 지극하여 있다.

일찍이 부친께서 등창이 나서 毒菌이 체내에 들어가 백약이 무효로 거의 死境에 이르렀다. 이에 선생은 血誠을 다하여 입으로 부스럼 속에 독균을 빨아내어  完治하였다 .

 그후 모친께서 또 大腫을 앓게 되었는데 醫藥  鍼灸로는  治癒가 되지 않아 病勢는 극히 惡化되었다. 이때 선생은 백방으로 정성을 다하여 救療를 한 결과 完快된 것은 지극한 효성에 神明이 감동잠이였다.

이 사실이 鄕里에 알리의 지자 固城郡 士林이 천거하여 嘉善大夫 兵曹參判에 贈爵이 되고 孔子聖積閣聖學淵 源錄編輯所로 부터 表彰狀과 褒賞이 있었다 .

문헌 창원 황씨 족보


 農巖 進士공  黃敏達

 감사월포 공신 신석기의 후손이다.

고려 왕 때 벼슬하여 佐理功臣 책훈 되고 벽산심한 

중대강문하평사  회산 부원군이요 회암이요 시호는 공희공이다.

忠定王 원년에 都僉議參理에 陸棲八月에 회산부원군이되시는 후손이다.

致身1549년 명조는 4년 을유년 陽誠 縣監 아들이시다 .

 공의 위는 민달 초위는 숙 자는 公望  호는 농암 진사 贈 嘉善大夫 同知中樞府事 이시다 1604년 선조 37년 갑진년~ 1627년 인조 5년 정묘년 初場及第 하여 진사가 되었다.

  從叔 夢竹公   致敬의  全羅監事로 계실 때 함께 羅州 靈岩 康津 長興 지방을 巡視도중 全羅南道 長興郡 장흥읍 평장리에 우거 하시니 洛南祖 이시다. 그때 평장리 일대에 荒蕪地를 발견하시고 자력 開拓하고 耽津江 독실보를 築造하여  農業用水로를 개척하여 荒蕪地 일대가 황금 옥토로 변함에 만인이 敬異仰慕하였다.그 후 농촌 復興 發展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나라에서 恩寵과 蔭補를 내렸으나 굳이 辭讓하시고 오르지 營農과 後學開道의 全力을 다하여 있으니 참으로 후대에 귀감이 되었다. 지금 전설에 의하면 旱魃이 들면 그곳 주민들이 耽津江 독실보 일명 黃進士 보에 정성을 들여 祈雨祭를 모시면 비가 내린다는 傳說이 있다.

  1673년 현종 14년  계축년에 拙 하시었다.

 初葬은 全羅南道 장흥군 장흥읍 평산리 후산에 安葬 하였으나 후손들의 합의하에

1982년 임술년 3월 15일에 전라남도 강진군 강진읍 신풍리 안산 산 1번지 琴瑟嶝 양지바른 곳에 안장 移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