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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조목종

해월 선생과 그 일생

 海月 선생과 그 일생

 海月 黃汝一 선생은 명종 11년 10월 21일 ( 1556년 )  기성면 사동에서 나셨다.

 體軀가 크고 얼굴이 깨끗하여 첫눈에 그 인물이 非凡함을 느끼게 하였다 한다.

 다섯 살 때부터 아버님인  黃응징에게  글을 배웠고 여덟 살 때부터는 정명 뒤에 사시는

 중 백부 황응청( 대해 선생) 에게 그를 배웠는데 재주가 뛰어나 곧 문리가 터져 학문이 날로 성취되었다.  그러므로대해선생이 매우 기뻐하시고 아우 응징에게 우리 집 안 문호를 일으킬 자는 반드시 이 아이니라 하고 칭찬하였다 한다.

 살림이 가난하여 조석으로 죽을 면치 못 했지만은 그래도 사동 정명간 십리가 넘는 서당 왕래를 한 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어머니께서는 그를 측은히 여겨 사흘에 한 번씩은 점심을 싸 주셨다 한다.

그런데 언젠가 증명 사당에서 돌아오는 길에 척산에서 우졸을 만나 나를 그 말에 태우고 우리 집까지 모셔라. 하고 사뭇 명령조로 말하니 그 郵卒(지금의 우체부) 은 너무 기가 막혀 물끄러미 바라보니 불과 10세 미만의 어린 소년이 태연자약하게 눈 한번 깜짝 하지 않고서 있는지라.  그 비범한 태도가 奇特하여 자동까지 태워 드렸다 한다.


 14살 적에는 이미 四書三經을 다 읽고 卽興시를 읊을 수 있는 실력이 되었다 그 해 가을에 간성에서 진사 시험이 있어서 응시를 한 결과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간성으로 가는 길에 삼척 죽서루 올라 가서


 어젯밤 은하수별 하나 울진 땅에 내려와서

 수위 취해 삼척 땅을 찾아 보니

 흥거로운 마음 한량 없어서

 죽서루에 올라와 두루 살피니

사람은 하나도 보이지 않아

 외로이 돌아서서 피리 불면서

 눈가 대로 향하여   걸음 옮겼네 .


하는 시 한 수를 읊었다.

 그 당시에 삼척 부사는 1세의 명필이요 문인으로서 이름이 높은 양봉래인데 그것를 보고 글이 잘 되었다고 크게 칭찬하였다. 한다 .

16 살 때는 강릉서 과거시험이 있어서 응시했는데  그 결과 강릉에 김모라는 사람과 둘이 성적이 비슷하여 시험관이 김모는 어른이고 황여일은 아이니 어른에게 장원을 주는 것이 옳은 일이니 그리 알아라 하였다. 해월은 과거에서 사람을 뽑는 것은 글의 우열로 정하는 것이니 다시 시험을 보여 주시오. 하고 강경히 항변하니 시관이 할 수 없이 다시 갈매기가 고기를 물고 절로 들어왔다. 하는 글제목을 내어 글을 짓게 하니 해월이 즉석에서 글을지어 올려 마침내 장원을 하였고 시관과 사람들이 그 글을 읽고 탄복하였다.


그 후  해월은 기성면 황보리에 있는 수신사 절에 들어가 3년 동안이나  절 밖으로 나오지 않고 시전 공부에 온 정신을 기울였다.

 그동안  지은 시가 300 여수가 된다 하니 얼마나 애썼는가를 알 수가 있다.


열아홉 살 때 할아버님을 여의고 스물 한 살 때 안동 내앞 학봉 김성일(  임진왜란 때 일본의 통신 부사로 갔다 왔음) 의 종 형되는  김수일의 따님에게 장가를 드셨는데 한 번은 처가집에 가니 경상 감사가 안동에 와서 백일장을 보이는데  해월도  학봉 선생의 권유에 따라 백일장에 나가서 응시한 결과 치술령부라는 글을 써 올렸더니 장원급제 되고 감사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그글을 돌려보고 칭찬이 자자하였다.

그 해에  서울에 올라가서 조정에서 보이는 진사 시험에 응시한결과  3등으로 급제하여 비로소 정식으로 진사 자격을 얻었고 성균관과 문묘를 출입할 수 있는 특권을 얻었다.  하루는 궁중에서 왕세자의 학우들이 모여 연차를 지낸다기에  해월은 학우 자격 시험인 舍人 벼슬을 못 했으면서 무모하게 참석하니 모두 다 비웃고 조롱 하였으나 결국  해월의 인물과 실력을  알아 주고 모두 다 친히 사귀는 결과가 되었다.

그 다음에 고향에 내려와서 종제  황유일 같이 온정 백암산 백암사에 들어가 공부를 했는데 백암산 허리에 한 개울이 있어  종제인  유일은  월명계 라고 이름 짓고 그  개울에  큰 바위가 있으니  해월은 이를의  어풍대 라고 이름 지었는데 이에 종제 가 죽어 버리니 해월이 제문을 지어 

명월은 겨울에 가득한데

 사람은 간 곳 없고

 어풍 대만 홀로 남아

 외롭기 그지없네


 사고소식 때이를 믿지 못해 몹시 슬퍼했다 한다.

 그 이듬해인   계미년 6월에 서울 남부동 에 계시는 장인 구봉 김수일이  병이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부랴부랴 새벽 길을 떠나 서울로 향하였는데 충북 달래 강변에 이러니 연일 소낙비가 쏟아져 부득불 5,6일 지체 되었는데  서울로가 보니  구봉은 이미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후 반 년 동안이나 서울에서 놀다가 그 외에 12월에 구봉의 시체를 모시고 안동으로 돌아오는데 풍기에 이러니 아버님께서 기별이 왔는데 서울서 과거가 있는 모양이니 곧 돌아가 응시하라.  는 엄중 한 내용이었다.할 수 없이 돌아가 응시한 결과 4등으로 급제하여 더욱 더욱 글재주가 빛나게 되었다.

 장인어른의 장례 관계도 있고 해서 곧 돌아오려고 하는데 이번에는 외삼촌인 정담이 알성 무과에 장원하는 바람에 붙들려서 근 1년을 더 서울에서 머물러 있게 되었다. 이 동안에 서울 문인 금난수. 김부륜 등과 사귀게 되고 뒤에 영의정까지 지낸 약포 정탁 선생 간제 이덕홍 선생들과 깊이 사귀게 되었다.

 그 뒤 고향에 돌아와 종형 황윤일 정호문과 같이 다시 수신사에 들어가 공부 하셨는데  이 동안 울진읍 옥계 서당에서 남격암 선생을 만나 시사를 논 하신 바도 있고 권성서와 더불어 안동 노강서원을 방문하여 그곳 선비들과 놀면서 글도 짓고 하였다.

 30세가 되던 을유년 10월에 서울에 올라 가서 별시 을과에 장원급제하여 비로소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 이라는 관직에 들어갔는데, 불과 보름이 안 되어 승문원 부정 이란 벼슬을 받고 또 보름 뒤에 희릉전사관에  인명 되더니, 또 이어서 호당에 들어가라는 선조 대왕의 특별 명령을 받게 되었는데 호당은 국가 장래를 위해 크게 명망이 있는 젊은 선비들 많이 들어가 공부할 수 있는 왕립도서관과 같은 곳이다.

 그 이듬해 9월에는 예문관 시교겸  춘추관 기사관에  임명 되더니 다시 그 이듬해인 무자년에는( 33세) 입시야강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입시 야광이란 밤에 임금님을 모시고 강의하는 말하자면 임금님의 개인 교수인 것이다.

 선조 21년 4월에 고향에 돌아와서  뒷산에 서재를 짓고 이름하여 해월헌이라 하였는데 그해 6월에  다시 서울로 올라가서 8월에는 경상도 암행어사 발령을 받고 한 달 동안 경상도를 두루 살피고 돌아갔다.

 그 이듬해 8월에 일본서 중 현소가 공작새 두마리를 임금님께 헌납하니 임금님이 해월에게 명하여 경남 남양 바다 가운데 섬에 가서 일본으로 날아가도록 날려 보내라 하여 그대로 시행하고 돌아왔는데 10월에 대신 정은신과 이일장군 신립장군과 더불어 임금님의 부르심을 받고 공중에 들어가 선정전에서 국방에 관한 의논을 하였다.

선조 25년 4월의 함경도 고산찰방에 임명되어 부임 하였는데 몇날 뒤 4월 13일에는 일찍이 역사상의 볼 수 없는 처절 참절한 임진왜란이 벌어져 40일이 못 되어서 서울, 개성, 평양까지 빼앗기니 장사들은  갑 옷을 버리고  수령 방백은   달아나  내 몸 내 가족 살리는데 여념이 없었다.

  해월은   이러한 난중에  임지를 찾아 함흥에 이러니 함경 감사 유영입이 수천의 군병을 갖고도 아무른 전투태세를 갖추지 않고겁을 집어 먹고 떨고만 있었다.


  해월은  본래 이조의 근본지라 비록 서울이 함락되는 한이 있더래도 빼았겨서

 안 될 것이니 이렇게 안연히 있을 일이 아니라 군사를 움직여 摩天嶺의 군사를 복원하도록 하소서.  만약 마천령에 군사를 돕지지 않다가 실패하는 경우를 당하면 安州에서 함흥까지 사이에는 적을 막을 만한 성벽이 없으니 그때 가서 어떻게 하시겠소, 그러니 저 생각 같아서는 군사를 3회로 나누어 일군은 태조의 출생지인 영흥 흑석리를 지키게 하고 일부는 마천령 군을 도우게 하고 일부는 남군을 도우게 하는 것이 좋을 줄 압니다.


하니 감사가 그 말을 듣지 않더니 그 후 며칠이 안 돼서 왜적이 마철령을 넘어 함흥을 육박하니 감사는 병풍파에 후퇴하고 도사 박순남은 하음대에 후퇴하니

 곳곳에 도적이 일어나 창고를 부수고 군량을 훔쳐가 세상은 법이 없는 무법천지가 되고 말았다.


 해월은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잉어가 죽은니 미꾸라지가 날뛰고  범이  죽으니 여우가 설친다 드니  이때가 바로 그런 때로구나.

 깊이탄식하고 개유문을 써서 후방을 교란하는 일체의 범법행위는 엄벌에 처한다고  공고하였다.

 5월달에 들어서 서울이 함락되고 임금님은 조정 신하들과 평양으로 후퇴 하셨다는 소식이 들려 분통한 마음누를 길이 없어 하루 종일 서쪽으로 향하여 통곡해 마지 않더니  내 마땅히 임금님을 뵈옵고 나라와 겨레를 위해이 한 목숨 바쳐 싸우리라 하며 행장을 수습 하더니 그날밤 병이 들어 떠나지 못하게 되었다.

며칠뒤 임금님의 사위인   상락군 김기영과 칠계군윤탁연이  왕자 임해군과 화순군을 모시고 마천령을 넘어  안변에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곧 달려가 두 왕자를 맞이하였다.

 그런데 함경 감사 유영입은 두 왕자를 맞이하려고 함흥까지 왔다가 왜적이 두려워 돌아가니 두분 사이 말이 

한 도의주인되는 감사가 이렇게 마음이  비겁해서지도야 어찌   도민의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겠는가? 하고 해월 선생에게 명령하여 유고문을 써서 유영입에게 보내어 음중 문책 하도록 하였다.  

그 뒤 약 한 달이 지난 뒤에 조정에서 발령하여 유영입을 파직하고 칠계군 윤탁연을 함경 감사에 임명 하였는데 윤감사는 일찍부터   해월을 아끼는 사람인지라 조정해  계청하여 종사관에 임명되었다.

윤감사 군막에서 종사관으로  일하게된 해월은 우선 당면 문제인 군병모집 군량조달 선무공작 등등 잠을  못 자가며 많은 일을 했다.

 식량난을 해소 시키기 위하여  군관 최우와 더불어 혜산보에 있는 잡곡을 옮기느라고 한창 애쓰다 보니 회령의 관속 국경인이라는 놈이 반역하여 사병을 이끌고 쳐들어와서 많은 군관을 죽이고 두 왕자의 많은  배종신하들을 사로잡아 적장 가등청정에게 항복하니 선생도 또한 사로 잡혀 적군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그날 비를 맞아가며 두 왕자를 모시고  덕원부로

끌려 갔다가 다시 문천군으로 문천군에서 다시 고원군으로  고원군에서 영흥 부로 전전 이송 되면서 온갖 목욕 와  굴욕을 받다가 두달이 지난 뒤 7월에 이르러 선생과 더불어 몇몇 대신들이 석방되었다.

선생은 곧바로 삼수사 윤경도를 찾아 가니 윤경 도는 반가이 맞이하면서 하는 말이 앞에는 왜적 쳐들어오고 뒤에는 여진족이 번갈아 쳐 들어오니이 일을 장차 어찌하면 좋겠소 하니 선생님 말이 여진족은 지역적인 근심거리 밖에 못 되고 왜적은 국가 존망에 중대한 적 있니  함흥에 있는 외적부터 먼저 치자 하니 윤공이 그 말이 옳다, 하고 그렇게 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이때 함흥의 토호 진대유와 그 아들 진게수 부자가 외적에게 항복하고 그 앞잡이가 되어 백성을 해롭게함이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해월은  진대유 부자의 친근한 한덕원 한덕구 형제에게 명하여 누누이 그 가을을 지적하고 개과천선도록 권해 보았으나 듣지 않으므로  부득불 김수준 최찬 등 두  군관을 보내 어 잡아가서 죽이고 임금님께 그 사유를 보고하였다.

 10월 달에 일하러 모든 작전 준비가 완료되었다 윤경도와 이마를 맞대고 만반의 작전 계획을 세워 함흥으로 쳐들어가 주야 3일간 역전 고투 하여 적으로 하여금 50리를 후퇴하였다.


 선조 26년  정월 임금님의 부르심을 받들고 의주 행재소로 가서  임금님을 배알하니 그간 외직에 있어서 공이 많다 하시며 승의랑형조정랑  벼슬에 특진 시켜 주시고 앞으로는 내직에서 근무 하라는 고마우신 말씀까지 계셨다.

 4월에 학봉 김성일 선생이 진주 싸움에서 전사 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선생은 비통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제문을 지어 보내되,

섬 오랑캐 아직도 내쫓지 못 하고이 땅을 짓밟고 있는데 하늘이 어찌 충의로운 신하를 버리시나이까? 참으로 해와 달이 어둠과 같고 크나큰 고목이 쓰러진 것 같소이다 하였다.

 우리 민족의 구원의 사도라고 우러러 보던 명나라 장병들은 날이 갈수록 약탈, 능욕 등에  횡포한 본색을 드러내어 우리 백성들은 오직 아연실색할 뿐이  였었다.

 영의정 유성룡은 해월을 선생을 불러 江上禁斷管 임명하고.명군은 어떤 짓을 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어찌 할 수 없 소 우리는 오직 우리 국민 가운데 나쁜 짓을 하는 놈만 다스릴 수밖에 없으니 그대는 곧 의주 강변에 가서  明軍과 작당해서 민간인의 소와 말 과제물을 약탈하여 나누어 먹는 통역관들을 샅샅이 뒤져 그놈들의 모가지를 베어 대중 앞에 본보기로 효수 하고 오시오 하였다. 영상에  눈가에는 아직도 눈물이 마르지 않았고 분함의 억한 그의 목성은 아직도 떨리었다.

해월 선생은 민족의 폐단의 일부분이라도 들어주기 위하여 이 소임을 맡아 하심에 전력을 기울여 사리를 위해 겨레를 좀먹는 그놈들을 철저히 조사하여 가차없이 처벌하여이  패단을 줄였다.

 명나라 변사  심유경의 기만적인 대일 평화 교섭을 마침내 성공하여  왜군인이 서울을 철퇴 하고 8월에 임금님이 서울로 환경 하심에 선생도 임금님을  모시고 서울로 돌아오셔서 시체가 산을 이루고 사람이  피로써 바다를 이룬 왕도 서울에 뒷 수습에 전력을 기울이면서 틈틈이 명나라 장수 이천총을 찾아가 화전법을 배워서 영의정 유성룡에게  아뢰어 그 보급에 힘쓰시었다.

거해 여름에는 휴가를 얻어 고향에 돌아와 약 3개월간 쉬시게 되었는데 그동안 서인 정철 일파에게 몰려 기성면  황보리에서 신산한 귀양살이를 하시는 전 영의정  이산해 선생을 뵈옵고 예물을 보내어 그 생활에 불편을 덜 주셨고 또  해월헌가를 지어 주시도록 부탁 하였더니  7월에 내한 장군이 산 밑에 조그마한 정자를 지어 이름까지  해월헌이라 하였다  운운 하는   해월헌기를 몸소 갖고 오셨다.

9월에는 환조 하여 도원수 권율장군의 종사관의 임명되어 행주산성으로 가셔서 임 난사를 빛나게 하는 행주대첩의 공을 세운바  많으셨고  이듬해 4월에는 권율장군을 따라 진주 싸움에 참가하여 많은 공헌을 세우셨다.

 명나라 변사  심유경의 평화 교섭이  일시적으로 성공하는 듯하더니 마침내 결렬되어 선조 30년 정월에는 또 다시 왜군이 14만 1천 5백 명이 재 침입하여  소위 정유재란을 일으켰다.

 이에 놀란 명나라 조정에서는 병부상서 형진을 총독으로 첨지도의사   영호를 경리로  전 도독  마귀를 종병관으로 임명하고  10만에 새로운 구원군을  보내었으나  남원, 진주  등에 여러 차례 싸우면서 무참히 실패하고  이순신을 몰아낸 원균 마저도 한산도에서   패전 하니 왜군은 점점 북상하여  직산까지 이르렀다.

 그 해 12월에 양호와 마귀가 패잔병 4만을  거느리고 도원수 권율장군의 휘하에 조선군세와 합류하여 가등청정이 굳게 지키고 있는  울산성을 포위 공격하였으나 왜구는 성 안으로 들어가 성문을 굳게 닫고 도무지 싸워 주지 않으므로 성을   포기 하기  10여 일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하고 돌아왔다.

   해월은  이 싸움 아닌 싸움에 참가하여 엄동설한 12월의 눈 비를 맞아가며 동분서주 뒷바라지를 하다 보니 손발이 터져 동상이 다른 사람의  배나 되었다.

 이듬해 9월에는 사헌부장령에 임명되었는데 10월 달에 일하러 명군이 찬획 주사 정웅태가 경리관 영호의 사소한 사감으로 거의 온갓 죄목을 들어 명의 조정에 무고 하니  양호는 드디어 파면 되고 말았다.

우리나라 조정에서는 양호가 우리나라의  끼친바 군사적으로 공로를 아끼어  명나라의 누누이 상주 해서  양호가 무죄하니 파면을 철회해 달라고 간청하였더니 정웅태는 자기 신변이   위태 함을 느끼고 또 다시 거짓 보고로 우리나라 조정이 일본과 내통하여 명나라에 반역한다. 하고 구체적인 예까지 들어 심각하게 논란화 했다.

임금님께서는 크게 놀라 부랴부랴 변무사를 보낼 새, 정사에  우의정 이항복, 부사에 이조판서 이정구 서장관의 해월 황여일을 임명하고 상주문는 이정구에게 쓰도록 하여 급히 떠나가도록 했다.

 11월에   무변사 일행이 의주( 신의주) 이르러니 선전관 허전이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말을 달려 쫓아와서 조정 명령을 전달하는데 내용인즉  상주문 가운데 16 자를 고치라는 것이었다.  해월 선생은 직책상 압록강에 배를 띄워 놓고 구례에 의하여 명나라 조정에 바칠 예물을 점검하고 다시 밀봉하여 서장관인을 찍었다.

 명나라 요동에 있는 회원관에 이러니 그곳 관리들이 공연이 트집을 잡고 까다롭게 굴어 3일 만에 약 겨우 마표( 여행 증명서 같은 것)  를 얻어 떠나게 되었는데, 이듬해 정월에 수양산하에 이르러 백이숙제 묘를 배알하고  통주에서 다시  예물을 점검하고 정월 22일에  황성(북경) 옥화 관에 이르렀으니 근 4개월이 걸린 셈이다.

 2월 1일에  각로(중국의 벼슬 이름)  삼일관의 인도로     궐내에 들어가 임금님을 배옵고 상주문을 올리는 동시에 영호가 무죄함 역설하고 그의 군공을 높이 찬양 하였으며 일본과 내통했다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정은태의 무고임을을 밝히니 임금님께서는 즉석에서 정응태를 파면시키고 양호를 복직 시켰으며 상주문의 글이 잘되었다고 월사 이정구를 극구 칭찬해주셨다.

다시 명나라 조정에 나아가니  심각노를 비롯한

여러 중신들이 말하기를 정응태의 보고에 의하면 너의나라 신숙주가 쓴 해동 제국기에 중국  연호를 쓰지 않고 너희 나라  연호   만을 썼다 하니 사실인가 ?  하니 정사 이항복이 그런 것이 아니었고 소국 연호를 먼저 쓰고 그 밑에  주해서 대국 연호를 쓴 것이옵니다. 예를 들면 가길 원이라 크게 쓰고 그 밑에 주서로 정통 6년이라 썼으며 성화 7년 밑에  홍치14년  이 라 주 했사오니 이것이  어치   대국을 저버린 것이옵니까? 하니 중국 제관들이 모두 다 알겠다 하고, 모든 오해가 다 풀어졌다. 이로부터 중국 관리 와 우리나라 사신들 가는 친분은 날로 두터워지고 가는 곳마다 주연을 베풀어 흥겨운 2개월은 꿈과 같이 흘러갔다.

 3월 21일에 사신  일동이 궐내에 들어가서 임금님께 하직인사를 올리니 임금님께서는 많은 상품을 주셨고 23일에는 광록사(중국벼슬이름)  취영험 의 안내로 임금으로부터 하사하신 송별 연회 상을 받고 밤늦게까지 즐겁게 놀다가 24일에는 길을 떠나 고국으로 향하였다.

 4월 5일 요동에 있는 회원관에 이러니  변부사 일행이 돌아온다는 급보를 받은 우리나라 조정에서는 사은사로 한응연을 파견한 것이 벌써 회원관에 일르러 상봉하게 되었고 평안도  회천군수 이 신기는 벌써 7 8일 전에 이곳 회원관 에 왔어 변무사 일행을 고대하고 있었다.

 4월 9일 압록강을 건너 의주의 이르러서 조정의 중간보고를 올리니 조정에서는 유건을 검찰사로 한덕원 적반사로  각각 임명하여 급히 보내니 평양에서 만나게 되고 평양에서는 서울까지 오는 사이 골마다 환영의 인파가 길을 이었다.

4월 5일 서울에 돌아와서 임금님께  복명하니 임금님은 크게 잔치를 베풀어 그간의 노고를 위로해 주시고  각각 1 계급식 벼슬을 올려 주셨는데 해월 선생에게는 중훈 대부 장악정겸 여고에 임명해 주었다.

 5월에 휴가를 얻어   고향에 돌아와 9월까지  쉬시게 되었는데 그동안 안동 도산서원에서 퇴계 문집을 출판 한다기에 수고하는 문인들에게 치하하는 서신과 함께 많은 폐백을 부조하였다.

 10월에는 예천군수  발령을 받아 12월에  부임해 가셨는데 이동 안 정약포 선생과의 접촉이 잦아 교분이 더욱 두터워졌고 안동 부사의 연차에 초대를 받을 때에는 부 판결 공을 모시고 참석하였으며 이듬해 9월 3일에 임지에서 김씨 부인이 돌아가셨다.

이듬해 봄에 정약포 손되는  이구의 따님을 부인으로 맞이하였고 다시 이듬해 정월 11월에는대해 선생님이 돌아가셨고  9월에는 정약 포 선생 마져 돌아가셨다.

선생이 51세  되던 4월에는 금성  현령으로   전근 되셨고 이듬 해 9월에는 영천 군수로 전근 되셨고

 광해 3년 10월에는 통정대부 길주 목사에 임명되었으나 임치 않았고 광해 4년에는 창원 부사에 임명되어 갔다가 광해 7년에 동래 부사로 전근, 광해 10년 9월에는 통정대부 공조참의 임명되었으나 당파싸움의 패단을 깊이 탄식하면서 부임 치 않았다.

 선생은 67세 되던해 4월 2일 신병으로 돌아가시니 부고를 받은 조정에서는 가선대부 이조참판을  증직해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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