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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조목종

선조의 얼

선조 사적순례


  平海편

 大海 선생과 그 일생

 大海 선생은  기성면 정명리 사람인데 이름은 應淸이요 자는  淸之인데  宣祖 대왕 때의 사람이다. 증조부 漢城判官을 지낸 黃玉崇 이오, 증조부는 成均生員을  지넨 黃輔坤이요. 그의    부친은  通政大夫 로써  星州 牧使를 지낸  黃瑀이다.

 타고난 天品이  남달라  大人의 기상이 넘쳐 흘렀으며 학문을 좋아하고 文章에 능하였다. 明宗대왕 께서  세자가 글을 배우기 시작한  행사를 맞이하여 과거를 보니 선생도 과거보러 서울로 올라가서 시험장에 들어가  策題를 보고는   대단히 불만히 여겨 응시치 않고 돌아왔는데 그 후로는 과거에 마음을 두지 않고 집안에 들어 앉아 眞理探究와 道德 연구에 온 전력을 다하였다.

 명종  말년에 임금님이 초야에 묻힌  學行之士 구하실새 선생의 德行이 일향에 자자하다는 보고를 받고 禮賓寺 參奉에 任命해 주셨으나  赴任치 아니 하셨고 그 뒤에 다시 開城延恩殿參奉에 임명 하시니 개성의 朴淵瀑布도 구경할 겸 赴任하셨다가 두 달 후에는 사표를 내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뒤 壬辰亂을 겪은 뒤에 다시 조정에서  掌苑署  別提에 임명 하니 올라가서 난 후에 민생의 疾苦와 政治의 腐敗를 일일이 지적하여 改善 방책을 擧論해서 임금님께 上疏에 올오리니 임금님이 보시고 매우 가상히 여겨 그대로 실행하신 바가 많으셨고 이조에 명하여 이러한 학행 유위지사에 적당한 벼슬을 주어 등용 하라 하니 또 이조에서 眞寶 縣監의 임명해 주었다.

선생이 臨地에 赴任하여 많은 功績을 남기시고 임기를 다 마치지 않고 2년 후에 사표를 내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좌우에 책을 산같이 쌓아두고 진리탐구에 여념이 없었다.

 禮安에 있는 月川 조목 선생은 退溪선생의 수제자로서  功曹參判 이르른 분인데 大海선생과는 나이도 갖고 생일과 시까지 같다. 전부터 교분이 두터워 그동안 서신 왕래가 잦았고 영해에 있는 査頓 朴大庵 과도 서신 왕래가 찾았다.

선생은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님을 섬기는데 고인의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고 살림이  가난하나 맛있는 음식을 공양하는데 힘을 다하였다. 그래서 향리에서 효자라는  칭명이  一鄕에 자자하였다.

그 자당 깨서 돌아가시니 묘소 옆에 그 居廬를 짓고 3년을 지내는데 매일 하루 한 번씩 집에 내려와 그 아버님을 뵙고 가지만 한 번도 內庭에 들어와 부인을 만나고 간 일이 없었고 후에 그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그렇게 하여 孝道를 다 하였다.

원 향리에서 그 지극한 孝誠을 칭찬 하나 겸손한 마음은 변치 않았고이 소문이 군수 귀에까지 들리게 되어 군수는  감사에게

 감사는 임금님께 보고하니 선조 40년에는  나라의 명령으로 孝子閣을  짓게하니 생시에 효자각을  지으라는 恩典을 받은 일은 일국을 통해서도 별로 없는 희귀한 일이었다 .

그 후 조정에서는 누누히 벼슬을 하기를 권 했지만은 명리를 좋아하지 않는 선생께서는 끝내 응하지 아니하였다.

 본시 기성 정명 일대는  바다 가까이 있는 마을이라 당시까지만 해도 禮道가 행해지지 아니하였고 따라서 冠婚喪祭 의 예가 매우 애매 하였는데 선생이 옛법 의하여 習俗을 일변 시켰으니 僻鄕에 예도가 일어남이 오르지 선생의 공이 컸던 것이다.

기성의 선비들과 더불어 鄕憲을 만들어 시행케 하니 이것은 오늘날 그곳의 한갓 生活規範으로 化해지고 말았다.

선조 대왕 때 領議政을 지내다가 黨派싸움에 몰리어 기성면 황보리의 와서 귀양살이를 하게 된 鵝溪 李山海가 대해 선생을 한번 만나 본 뒤에는 자신의 귀한 신분도 잊고 매일같이 찾아와 놀다가 기도하고 혹 머물러 가신 일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정명이란 동네는 越松亭에서 북쪽으로 15리 가량 되는 곳에 있는데 귀한 봉우리나 높은 재가 있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넓은 평야가 있는 것도 아니다. 운운하는 正明村記도 鵝溪 李山海 선생이 대해 선생댁에서 지으신 것이라 한다.

그러나 선생의 일생의 行狀이 어찌 이 것뿐이랴 마는 그 아들   居一,  有一, 慶一, 삼형제가 다 준수한 선비들이 었는데  모두 다 일찍 죽고 선생의 글들을 收拾해 正理할 사람이 없어 태반이나 잃어버리고 전하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哀惜한  일이다.

그러나 선생이 돌아가신지 400년이 가까워 오는 오늘 날까지 이고을 사람들의 話頭에서 사라지지 아니하니 道란 길이 죽지 않는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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