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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조목종

황인창. 황용한. 황석범.황인시. 황덕일. 황덕길. 황후간

돈지 돈녕부 사공 황인창

 1743년 영조 19년 개년~  1831년 순조 31년 신묘년 조선무 신자는 더 교 본관은 창문 의원군 거정의 후손 이요  첨지중추부사  색의 아들이다.

 1766년 영조 42년 수련회 생원이 되고 1771년 영조 47년 신묘년 무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홍이 부사맹이 되었다가  1773년 영조 49년 계축년에  모친상을 당하여 사임하였다. 1776년 영조 25년  의홍위  사맹이 되고  1779년 정조 3년 기해년에 용양위 사맹이 되고  1781년 정주 5년 신축년  정병위 부사정이되고 1787년 정조 11년 정미년  훈련은 참 군이 되고 1789년 정조 13년 계유년에 훈련원 주부 가 되고  1792년 정조 16년 임자년에 충무위 사과가 되고  1794년 정조 18년 갑인년에 세자익위사 좌익찬 이되고  1796년 정조 20년 병진년에  중추부 도사 가되고  1799년 정조 23년 개미녀 내 오이 도총부 도사가 되고  1801년 순조 원년 신유년 에 용양위  사직이 되고 1803년 순조 3년 계해년에  훈련원 참정이 되고  1805년 순조 5년 을축년 충무위 호군이 되고  1807년 순조 7년  정묘년 훈련원 정이 되고 1810년 순조 50년 경오년 훈련원 도정이 되고 1812년 순조 12년 임신년 첨지중추부사가 되고 1816년 순조 16년 병자년에 동지중추부사가 되고 1820년 순조 20년 경진년 동지 돈녕부 사가 되었다 1825년 순조 25년을 유년에 사임하였다


 문헌 창원 황씨 족보


 문학가 정와 선생 황용환


 1744년 영조 20년 갑자년~ 1818년 순조 18년 무인년  조선 문장가 자는  치현  호는 정와  본관은 창원 직대의 아들로서 충청북도 연풍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문학을 좋아하여 20세에 성리학자 대산 이상정 문장을 인정받으면서부터 크게 이름을 떨쳤으며 만년에는 많은 문인들이 찾아와 선생에게 지도를 받았다

 문헌 대계유고  창원 황씨 족보


 한림공 황석범


 1746년 영조 22년 병인년~ 1774년 영조 50년 갑오년  조선 문신 자는  맹 년  본관 창원  고려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해산 부원군  석기의 후손 이요.  재중의 아들로서 재정에  출결을 하였고 순교자 사영의 아버지다.  어려서부터 재질이 특이하고 총명이  과인하였다.

 1771년 영조 47년 신묘년에 2차 정시문과 병과로 급제하여 승정원 정자가 되고 여수 세자시강원에  전직 되었으나  일찍 죽었다

 문헌 한국 고사 대전 창원 황씨 족보.


 첨지 중추부사 일 수호 공  황인기

  

1747년 영조 23년 정묘년~ 1831년 순조 31년 신묘년 조선 문신 초명은 인기  처음 자는 전여  자는 경수   혹는 일수호  본관 창원  대사관 간의 아들로서 승리 학자 김원행에 사사하였다.


 1773년 영조 49년 계사년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1796년 정조 20년 병진년에  휘능 선봉이 되어정조의 총애를 받아 신간된 은중경 및  두율을 하사 받았으며  여러 벼슬을 걸쳐 종묘 서령이 되었다 순조즉위 후에는 임실  현감형 조정량 종친부 전부. 광주 판관 상의원 참정 강화부 경력 등을 역임하고 1826년 순조 26년 무술년에 첨지중추부사 이르렀다.


저서 미인지, 이심 창재

 문헌  매산집 한국 인명대사전 창원 황씨 족보


 성리학자 공백당 선생 황덕일

1748년 영조 24년 무진년~ 1800년 정조 24년 병신년 조선 학자 자는 췌수  호는 동백당 본관 창원 이곤의 아들이다.

 법전과 경서에 정통하였다고 과거와 배터리는 뜻을 두지 않고 아웃 없길과 함께 실학파 데가 순암 안정복의 문화에서 성리학을 닦다가 스승이 죽은 뒤에 이황 주자를 사숙하였다.    서학을 배척하고 스승의 유분을 전술한 3 가량을 제자에게 가르쳤다 일생을 학문의 마치고 1800년 정조 24년  병신년에   서거하였다.

 저서 공백 당집

  편서: 역학 심전,  효경 외전. 춘추 부의.  사서일득록 사례요의   가례익

 문헌 조선 도서 해제  조선 인명대사전 창원 황씨 족보.


 학자 하류 선생 황덕 길

 출생년도 미상~ 1767년 영조 43년 정해년 조선학자 자는 이길 거는 하려 본관은 창원 이곤의 아들이다.

 현덕 일과 함께 순암 안정복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해박한 학신을 가졌다. 과거와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만 전력하여 많은 양서를 저술하였다.

 편서 동현 학칙.  도학 원류.   찬언 17편  사례요의 동 유예설.  경충 문쇄

 저서 하려 집

 문헌 국조 인물지 홍이 변= 황덕길의하려고 집에 대하여 환의 돈선생 고희기념  사학론총   한국 인명대사전


 학자이봉선생 황후간

 1760년 명조 36년 경진년`  1833년 순조 33년 계사년 학자 자는 이직  호는 이봉 본관 창원 고려문화 시중 동중서문하평장사 회산 부원군 석기 후손 이요   도익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함이 범상치 아니하였다 부친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는데 권면치 아니하여도 공부에 부지런 하였고 침대를 깨우치지 아니하여도 문리의   효통하였다. 장성함에 따라  고서 연구의 뜻을 품고   밀암 이재 문하에서수업 하여 주자의 유상 및  월령 12괘  작도 부주. 상재 오복심의 제도  급 추자 실기.  도산 십 학도   등을 전수하였다.

 1732년 영조 6년 경술년 5월에  밀암 이재가  작고 하자 제산 김승탁을 찾아 가서 사사하였고 1737년 영조 13년 정사년에 재산 김성태 사문 변무사로 정의에 유배되었다가  광양에 이배  되자 선생은 스승을  섬진 적소에 찾아가 사서와  계몽 주서 상례제편  강의하였다.

 1747년 영조 23년  정묘년 예 스승  제산 김승탁이 배소에서 작고하자   방어산 밑에  이산정사를 짓고  자호를 이봉이라 하고  그 곳에 은거하였다 선생은 빈궁으로 그 낙을 고치지 아니하고 명예와 이해로서 그 마음을 움직이지 아니하니 원근 각지에서 그 명성을 듣고 수업하러 오는 사람이 날로 늘어 제자 중에는 학업이 대성 된 자도 적지 않았다.

 부모를   섬김에는 도를 다하고 상제시에는 그 예를 지킴이 어김 없었다.

흘봉 이빙망 과 더불어도림원에 설강을 하여  영재 육성에 힘쓰는 한편 동기들과 함께 산수가 고요한 곳을 찾아 자연을 즐기기도 하며 항상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손에서 책을 떼는 일이 없었다.  고서를 탐독하고 도학을 숭상하며 일생을 통하여 한결같이 소식과 포이에 안연자락 하니

당대의 명유들이 많이 따랐다. 그 중에 교분이 가장 깊은 사람은 용와  유승현  곡천 김상정 강좌 권만.  대산 이상정.  구사당 김락행.  인재 김우한  농고당  황학.   흘봉  이빈망.  자부 박상절.  청희 조영휘.  지암  신애룡.  등이 있었다.


 1833년 순조 33년 계사년 2월에 서 거 아니  인근 사람들이 다 말하기를 유림의 종백이 없어졌다고 말했다.


  저서 이봉 집 

  문헌: 창원 황씨 족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