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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이야기

신라 충신 박재상

신라 충신 박재상과 김시습

계룡산 동학사 근처에 박제상 위패를 모셔 놓은 동계사와 고려충신 삼은을 모신 삼은각이있다.

박제상은 충신이기도 하지만 천부의 이치를 처음으로 접한 사람이라고 한다.

왜국에 볼모로 잡혀간 신라  왕자 미사흔을 계교로 탈출시키고 자신이 잡히고 차라리 계림의 개가  될지언정  왜국의 부귀영화는 싫다

하고 목도 (대마도)에서 장열한 최후를 마친다

박제상의 위패를 충청도 땅 계룡산 골짜기 까지 모셔 온 사람은 생육신 매월당 김시습이다.

박재상이 목숨을 구해준 미사흔이 바로 김시습의 시조라고 하니 이는 조선시대의 불우하고 기이한 행동을 한 천재 김시습 이었다.

박재상이 목숨을 구해준 미사흔이 김시습의 시조라고 하는 사실을 알면 불우했던 천재의 기이한 행각은 이해가 될것이다.

박재상은 누구인가하면...

그는 신라 파사왕 5대손으로 어릴때 유모의 등에 엎혀 있는 재상을 보고 진나가던 걸승이 그 아이는 견우성의 화신이니 공들이 키우면 나중에 반드시

나라와 백성을 크게 구할 것이라고 점쳣다.

과연 그예언은 그대로 맞아서 남달리 총명이 빼어났던 재상은 나이 스물에 나라의 모든 문서를 관리하는 보문전 최고의 책임자인 태학사에 임명 되었다.

오래된 문서를 정리하던  재상이 귀비고 깊숙한 곳에서 기름에 쌓인 구리 거울을 발견한것이 그의 운명을 바뀌어 놓는 게기가  되었다.

단군이 백성을 다스릴때 하늘로 부터 받았다는 천부3인 가운데서도 삼라만상이 생하고 변하고 멸해가는 이치를 담은 천부경이 새겨져 있기때문에,

대통을 증명 할 수 있는 보물중에서도 보물인 이 구리 거울은 부여 재실의 왕녀 파소가 품고 왔다가 박혁거세 대에 이르러서는 금척(금자)으로 변해서

모량벌 남쪽 마흔개나 되는 흙 무덤 속 어디엔가 감추어 졌다는 전설을 남겼다.

그러나 실제의 구리 거울은 세오녀라는 깜찍한 계집 년에 의해서 바다건너 왜국으로 갔다가 신라에서 막대한 보물을 주고 바꾸어 온 하늘의 해와달과

비교될 만큼 귀중한 것이 아니었던가?

박재상은 그 박식함으로도 구리 거울의 뒷면에 새겨진 천부경의 여든한 자의 비밀을 끝내 다 풀지 못했지만 천부의 뜻을 쫒아 왕도 정치가 아님 부도 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그는 삼랑주(양산)의 간으로 좌천 되어 변경으로 쫓겨난다.

일성 임금에게 구박을 받던 눌지가 마립간의 자리에 오르자 사정은 바뀌었다.

박재상은 먼저 고구려로 들어가 그땅에 잡혀간 왕자 실성을 구해오고, 채 여독이 풀리기도 전에 다시 율포 바다에 배를 띄워 왜로 건너간 것이다.

박재상은 왜왕의 갖은 협박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버티다가 마침내 왕자를 신라로 보내고 불에 타서 죽고만다.

 치술령 높은 바위위에 올라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충신의 부인과 두딸은 그 비보를 듣는 순간, 몸이 굳어 망부석이 되고

혼은 새가되어 날아 갔다는 전설을 남겼다.

그 박재상의 외동 아들이, 누더기 처럼 기운 옷을 입고 다녔고 방아타령을 지은것으로 세상에 알려진 박문량, 바로 그 백결 선생이다.

거문고의 달인이였다는 것만 세간에 알려 져 있을 뿐 그가 마침 내 율려(소리)로서 천부경의 오묘한 이치를 풀었다는 것은 아무도 모른다.

세종임금때 박재상의 후손 박연도 음을 통해서 천문을 읽을 수 있는 달력 "칠정산"을 만들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흔치 않듯이

박문량(백결)의 아들이 단석산에서 김유신을 지도했던 마령간, 그 사람이다.

삼국 가운데서도 가장 열세였던 신라가 삼국을 합병 할 수 있었지만 천부의 가르침을 쫒지 않고 당나라군사를 끌어 들인 데다,

흉흉해진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법흥왕때는 이차돈이 순교하면서 불법을 펴게되니, 신라의 패망과 구리거울은 마의 태자의 품에 안겨

마골산(금강산)깊이 숨어버리고 다만 천부경의 오묘한 뜻은 영해 군수로 봉해진 영해박씨 종가에 부도지란 이름으로 세습이 된다.

고려때에는 부도지가 직접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천부의 이치를 익힌 강감찬 장군이 거란의 대병을 막는 힘이되었고,

영해 박씨후손 박서장군은 몽고군대장 살례탑의 가슴을 서늘케한 대승을 거두게한다.

그러나 고려에서는 천부의 도를 흐리게하는 불도를 더욱 숭상하게되고, 그결과 요승신돈 같은 인 물이 권력을 틀어 잡고 횡포를 부릴때

조선조를 세운 이태조의 이안사는 홀로 금척의 행방을 찾아 전주에서 솔가하여 영해로간다.

영해에서 삼척으로, 삼척에서 함경도 지방까지 영해박씨 종손의 뒤를 쫒았지만 부도지를 찾아내지 못한체 야심 만만한 이성계 대에 이르러

마침내 영해 박씨후손인 밀양인 박자초를 금강산 깊은 곳에서 찾아냈으나, 천부경도 금척도 얻지못했다.

다만 후일 무학으로 법명을 바꾼 박자초의 계교에 따라 위화도 회군을 할 때 3대 불가론을 펴면서 이성계는 꿈에 금척을 보았노라 소문을 퍼뜨린다.

신라의 첫 거서간 박혁거세가 하늘로 부터 신표를 받았던 것을 흉내내기 위함이다.

그러나 당장 대통을 증명해 보일 물건이 없다보니 꿈에서 보았다는 형상 그대로 길이 다섯치의 용이 입에 구슬을 문 금자를 만들어 몽척이라 이름하고

궁중에서는 금척무를 만들어 추게했다.

이천부의 이치를 제대로 쫒은 것은 세종 임금때였으나, 세조가 천륜과 인륜을 함께 저버린 소위 계유정란을 일으키자 영해박씨의 후손들은

부도지를 품에 안고 금화 땅 깊숙히 피신해 버렸고 영해 박씨와 대대로 세한지맹(의형제)의 관계로 지냈던 김시습은

경주금오산 깊숙이 숨어 금척지와 금오신화

두권의 저서만 남긴체 박제상의 위패를 모시고 계룡산을 찾은 것이다.

매월당 자신은 동계사 서쪽 무량사에서 불우했던 천재의 한많은 눈을 감는다. 

이글은 김수용의소설 격암유록에서 발췌한 글임을 밝힘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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