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산

백화산993m

qndns 2005. 7. 11. 10:04

백화산993m
충북 영동 황간 쯤 경부고속도로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험한 산세가 산꾼을 부르기에 여기에
언젠가 한번은 올라야 겠다 했더니 올해 들어 그 기대가 이루어졌다.
황간 톨 게이트에서 빠져나와 49번 도로를 따라 상주쪽으로 오도재를 넘으면 바로 상주군
모동면이다.

여기서 서쪽으로 바라보면 오를 만한 산이 보이는데 이것이 바로 백화산이다.
지도에는 일제의 장난으로 포성봉으로 표기 되어 있으나 근래에는 백화산으로 표기된 것이
많다.

수봉리에서 서쪽으로 바라보면 옥동서원과 나지막한 산줄기 끝에 백옥정이 단아하게 보이고 정자 아래 맑은 내가 흘러 풍류를 즐길 마음이 생긴다.

옥동서원은 황희 정승의 모시는곳으로 잘알다시피 본관은 장수長水)이며 호는 방촌. 시호는
익성(翼成). 개성(開城) 출생으로. 고려우왕 때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창왕때 문과에 급제,
이듬해 성균관학관(成均館學官)에 재수 되었다.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은거했으나, 이성계(李成桂)의 간청으로 태조때 성균관학관으로 세자우정자(世子右正字)를 겸임, 그 후 많은 직책에 두루 역임했다.

민무휼(閔無恤) 등의 횡포를 제거하고, 그 후 이조판서로 세자 폐출(廢黜)을 반대하여 공조판서로 전임되었으며, 이어 한성부판사(漢城府判事)가 되었다.

충녕대군(忠寧大君:世宗)이 세자로 책봉되자 이를 반대하여 서인(庶人)이 되고 교하(交河)로 유배, 다시 남원(南原)에 이배(移配)되었으나 세종 때 풀려나와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에 올랐다.

벼슬에서 물러날 때까지 18년간 영의정에 재임하면서 농사의 개량, 예법의 개정, 천첩(賤妾) 소생의 천역(賤役) 면제 등 업적을 남겨 세종의 가장 신임받는 재상으로 명성이 높았다.

또한, 인품이 원만하고 청렴하여 모든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며, 옥동서원(玉洞書院) 등에 제향되고 있다.

이곳의 지형을보면 서부·남부는 백화산:(933 m)·지장산(772 m)·성봉산(星峰山:572 m) 등
의 산지로 둘러싸이고, 북부에는 저지가 펼쳐 있다. 면의 중앙을 석천(石川)·신천(新川)이
Y자형으로 합류해서 남서류하여 하류부에 넓은 충적평야를 이룬다
백화산은 영동과 상주의 경계에 걸쳐 있는 산을 경계로 남북방향으로 뻗는 소백산의 한 줄
기이다.

북반부는 상주시 모서면(牟西面)과 모동면(牟東面)의 경계가 되고, 남쪽에서는 모서면과 영동군 황간면(黃澗面)의 경계가 되어 있다.

백화산(捕城峰:993 m)·주행봉(舟行峰:874 m) 등이 이어져 솟아 있고, 고도 700 m 이상의 능선이 연속되어 지세가 험준하다.

 

특히 모서면 쪽의 서쪽 기슭이 급한 경사를 보며 선상 지대에 이룬 잡목숲들이 어우러져 가을단풍이 절정을 이루었고. 산기슭의 모동면 수봉리(壽峯里)에 신라 최고의 내외석성(內外石城)인 백화산성(또는 금돌성)이국방유적으로 현재 80m가 신축되있다,

수봉리에서 계곡을 따라 계속오르다가 좌측 리본이 많이 붙은 계곡으로 오르면 지표조사가 끝난 왕궁터가 보이고 좌측 옆으로 나오면 무속인 터가 보인다 계속 옆으로 나오다 다시능선 안부에 올라서면 금돌산성이다.

백화산 정상을 오르기 전 바위봉은 동쪽 조망을 하는데 일품이요, 서쪽은 능선에 서면 모서의 일대를 그대로 내려다 본다.

 

정상에는 백화산이라는 조그만 비돌이 서있고 남쪽으로 주행봉 과 추풍령 쪽이 조망된다.
동쪽으로 도경계선을 따라 지루하게 계곡을 따라 내려오면 금강 상류인 석천계곡을 만나고
반야사에 들리면 삼층석탐과 500년 묵은 배롱나무를 만날 수 있다.
반야사 앞 내는 보를 막아 수원지를 이루고 절벽과 숲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계곡미를 감상할수있는 곳이다.
계곡을 따라 나오는 우측의 연릉 들도 절벽과 바위와 단풍으로 뒤덮혀 차를 타고 황간까지 계속 이어지면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산이다.
                         

                                        2001.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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