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조목종

황주홍..황성장.황덕신.황덕효.황 자룡.황정일

qndns 2020. 3. 13. 09:52

訓鍊院都正공  황주홍

 1722년 숙종 38년 임진년~ 1768년 영조 44년 무자년 조선 무신 자는 君興  본관 창원 의원군 居正의 後孫 이요.대사성 용익 아들이다.

 1738년 영조 14년 무오년에 武科에 及第하여   護賁衛 司猛이 되고 1740년 영조 16년 경신년 호분위護賁衛 司正이 되고  1742년 영조 18년 임술년에 忠武衛 副司果가 되고  1744년 영조 20년 갑자년에 總務衛司果가 되었다

1747년 영조 23년 정유년에 충무에 사직이 되고 1749년 영조 25년 기사년에 전라도 水軍  虞侯가 되었는데  이듬해에 父親喪을 당하여 辭任하였다.

 1754년 영조 30년 갑술년에 慶尙道  水軍僉節制使가 되었으나 이듬해에 母親喪을 당하여 辭任하였다.

 1758년 영조 34년 무인년의 平安道 兵馬僉節制使가 되고 1760년 영조 36년 경진년에 黃海道 兵馬僉節制使가 되고 1762년 영조 38년 임오년 京畿道 兵馬僉節制使 가되고 1764년 영조 40년 갑신년의 訓練院 正이되고 이듬해에 訓練院 都正이 되었다.

漢城府 判官 兼 五位都摠府 副摠管에 贈職 되었다

 문헌 창원 황씨 족보


 同知中樞府事 공  황성장


 1734년 영조  10년 갑인년~ 1791년 정조 15년 신해년 조선 무신 자는 聖三 본관 창원 의원군 거정의 후손 이요  훈련원 도정 중헌의 아들이다.

  1759년 영조 35년 김효년 武科에 丙科로 及第하여 世子翊衛司 左翊贊이 되고 1761년 영조 37년 신사년의 訓練院 判官이 되었는데 이듬해에 父親喪을 당한 사임하였다.

 1765년 영조 41년 을유년 五衛都摠府  經歷이 되고  1767년 영조 34년 정해년 龍驤衛 護軍이  되고 1770년 영조 46년 경인년 訓練院 정이되고  1773년 영조 49년 계사년에 訓練院 도정이 되었다.

 1775년 영조 51년 을미년에 僉知中樞府事가 되고 1778년 정조 2년 무술년 同知中樞府事가 되었는데 1788년 정조 12년 갑신년의 官職을 辭任하였다.

 문헌 창원 황씨 족보


 同知中樞府事공 황덕신


 1739년 영조 15년 기미년~ 1802년 순조 2년 임술년 조선 무신 자는 行源 義原君 居正의 후손 이요 訓練院 도정 주홍의 아들이다.

 1765년 영조 41년을 유년에  武科에 을과로 及第하여 훈련원   參軍이 되고  1767년 영조  42년 정해년 訓練院 主簿가 되고  이듬해에 父親喪을 당하여 사임하였다. 1771년 영조 47년 신묘년 함경도 兵馬 評事가 되고  1773년 영조 49년 계사년에 中樞府 都事가 되고 1776년 영조 52년 병신년 中樞府 經歷이 되고 1778년 정조 2년 무술년 慶尙道 兵馬僉節制使가 되고 1780년 정조 4년 경자년 平安道 兵馬水軍僉節制使가 되고 1782년 정조 6년 임인년 경기도 水軍節度使가 되었다. 1784년 정조 8년 갑진년에 僉知中樞府事가 되고 1887년 정조 11년 정미년 同知中樞府事가 되었다가 1797년 정조 21년 정사년 寺任하고 고향에 돌아와 性理學을 연구하며 餘生을 보냈다.

 문헌 창원황씨 족보.


  同知中樞府事 공  황득효


 1736년 영주 52년 병자년~ 1809년 순조 9년 기사년 조선 무신 자는 백원  본관 창원 의원군 거정의 후손이요.  도정 주홍의 아들이다.

 1783년 정조 7년  계묘년에 武科에 及第하여  義興衛 副司正이  1785년 정조 9년 을사년의 義興衛 正이   되고  1788년 정조 12년 무신년 世子翊衛司 左翊贊이 되고  1790년 정조 14년 경술년 世子翊衛司 左司禦가 되었다.

 1793년 정조 17년 게축년에 義興衛 司直이 되고 1795년 정조 19년 을묘년에 訓練院  僉正이 되고  1798년 정조 22년 무 5년에 訓練院  副正을 거쳐 1801년 순조 원년 신유년 訓練院 都正이 되고  이듬 해 同知中樞府事慶熙宮將이 되었다가 1808년 순조 8년 무진년에 辭任하였다.

 문헌 창원 황씨 족보


 효자 충효 공  황 자룡

 1568년 선조 원년 무진년~  1652년 효종 3년 임진년 효자  초명은 무진   호는 碧龍潭  본관 창원  恭僖公 石奇의 후손 이요 세진의 아들이다.

 壬辰倭亂 때에 軍功을 세워 折衝將軍 行龍驤衛 副司果 가 되었다.

 孝誠이 지극하여 慈堂의 병이 위독 하자 北斗七星에  致誠을 하고 斷指 하여 피를 자 당에 입에 넣으니 소생하여 6년을 더 장수 하였다 부친이 서거하니 묘 옆에 廬幕을 짓고  3년상을 마쳤는데 효성이 너무 극진 하니 개미도 묘소 내에 들어가지 아니 하였다. 柳川 韓浚謙 과  澤堂 李植 등은 말하기를 옛날에 이름난 효자 大連   大建  黃香에  견줄만한 孝子라고 하였다.

 일찍이 부친의 病患이  났을 때 노는 곳에 가서 약을 구하여 가지고 돌아오는데  날이 저물어 길을 잃고 방황하게 되었다. 이때 갑자기 큰 범이 나타나 길을 인도하여 줌으로 쉽게 집까지 돌아올 수 있었다. 그 후에도 집을 나갔다가 날이 저물면 그 호랑이가 나타나 여러 번 길을 인도해 주었다.

 1635년 인조 13년 을해년에 朝廷에서 中國朝廷으로부터 소행이 특출한 사람을 추천하라는  요청을 받고 제일 먼저 선생을 추천하게 되니 그 명성이 中外에 알려졌다 1650년 효종  원년 경인년 隱逸中樞가되고 조정에서 이름까지   子龍으로 改名하여 주었고1634년 인조 12년 갑술년 조정에서 산 旌門을 내리고 1653년 효종 4년 계사년에 다시 死後 정문旌門을 내렸다 이로써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살아서는 旌門 이요 죽어서는 紅門이라고 하였다.

 만년에  飛來道人인  楊萬世라는 사람과 같이. 五臺山, 金剛山 등 동해의 승지를 遊覽한 바 있는데 후인들이 공이 지나간 곳에 祠堂을 세우고  享祀를 하고 있다.

 후손들이  공이 출생한  北原에 살아온지가    우금  300년이 되었는데 지금도 효자댁 이라 하면  묻지 않아도 白龍潭後孫의 집안을 일컫는 것을 알고 있다.

시호는 忠孝이다.

 문헌 창원 황씨 족보

 

효자 안 도제 선생 黃精一

1608년 선조 14년 무신년~ 1669년 현종 10년 己酉년 학자 자는 자중   호는 안도재  본관 창원 高麗 門下侍郞 同中書 門下平章事 懷山府院君 石奇의 후손이며 通禮院  인의 세헌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재질이 聰明하여 장래가 囑望 되었으나 光海朝의 亂政을 보고 벼슬길을 斷念하고 咸安郡 伯夷山下에 들어가 趙魚溪와 함께 隱居생활을 하였다.

 선생이 7세 때부터 계속 친상을 당하였는데 哀痛하고 呼哭 하기를  成人과 다름이 없었다.

 6년 동안 廬幕 살이를  하였는데 너무 哀傷한 관계로 몸이 약해져서 사경에 이르렀으나  죽으로만 겨우 연명하고 있었다.

 이때이 고을 원이이 사실을 듣고 찾아와서  식육을 권하니 공이 눈물을 흘리면서 하는 말이 국상이나  친상에 어찌 식육을 하리오 하니 원이 탄식하며 하는 말이 이 아이는 7세에 忠孝를 겸하였다. 고하였다. 이 말을 전해들은 文康公 張顯光은 그의 子姪에 명하여 그 사실을 기록 하게  하였고 澗松堂 趙任道는 正錄 기재하였다.

  선생이 장성함에 따라  학업은 대성 하였으나  과거에 응시하지 아니 하고 道行을 崇尙하고  山水를 즐겼다. 1741년 영조 17년 신유년 暗行御史 李彦綱이 선생을 忠孝  學行을  임금에게 上奏하여 司憲府持平을  贈職 하였다 .

 문헌 창원 황씨 족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