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기천, 황지연, 황인대.황필수 황사영. 황상로.황윤. 황민호, 황인하, 황상기.
사헌부 장은 능산 공 황기천
1760년 영조 36년 경진년~ 1008 기상 기사는 조선 조선문신 서예가 내가 자는 효능 헌릉 산 후안 경마 병마절도사 인환의 아들이다.
1792년 영조 16년 임진년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1798년 정조 22년 무오년에 육품 벼슬에 오른 뒤 정조의 총회로 정환직을 거치지 않고 이조정랑이 되었으며 1801년 순조 원년 신유년에 문사랑에 이어 강동현 감을 거쳐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 종부시정이 되었고 1806년 순조 6년 병인년 사헌부 장령으로서 우의정 김달순을 탄핵 하는 합계에 참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용천에 유배되었고 고금도 예 입에 되었다가 1809년 순조 9년 기사년에 익종의 탄생으로 사면 되었다.
1820년 순조 20년 경진년에 경상도 도사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다.
문장에 뛰어나고 전서 예서 해서 초서 모두 일가를 이루었다 문헌 순조실록 예산집 근성서화미 국조방미 한국 인명대사전 창명 씨 족보.
한의대가 황지연 선생
조선 철종조 인물, 본관은 창원, 의학의 대가로서 고래의 의술을 정선하고 새로 얻은 경험방문을 첨가하여 가장 집약적이고 간편한 요람 서를 편성하여 의방합편이라 하였는데 내용이 충실하고 정밀하여 의학에 습득에 가장 편리하여 빠른 시일 내에 널리 보급되어 국민보건에 공언한 바 컸다.
선생님 아들 필 수가 선생의 저서에 다시 요항을 첨가 삽입하여 그의 이름을 방약합편이라는 이름으로 발행 아니 그 보급이 번성하여 의료계에 일대 혁신을 이루었다
문헌 진단 학회 국제역사
동지중추부사공 황인데
1761년 영조 37년 신사년~ 1821년 순조 21년 신사년 조선 무신 자는 2층 본관은 창문 의원군 그중에 후손이며 첨정 추의 아들이다.
1795년 정조 19년 을유년 무과에 급제하여 오위사맹이 되고 1797년 정조 21년 정사년에 오이부사정이 되었으나 이듬해에 부친상을 당하여 사임하였다. 1801년 순조 원년 신유년에 훈련원 참군이 되고 1804년 순조 4년 갑자년에 훈련원 판관이 되고 1807년 순조 7년 정묘년 훈련원첨정이 되고 1812년 순조 50년 경오년 오위 부호군이 되고 1813년 순조 13년 계유년 충무위호군이되고 1815년 순조 15년 을해년에 황해도 병마 첨절제사가 되고 1817년 순조 17년 정축년 강원도 병마첨절제사가 되고 1819년 순조 9년 정묘년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문헌 창원 황씨 족보
한의대가 혜 암 선생 황필수
조선 한의 호는 혜암 본관 창문 도정 지은의 아들로 유학을 공부하는 한편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한의술을 연구하여 당대의 유명한 한의로 이름이 높았다.
선생은 아버지께서 저술한 의방활투에 요항을 삽입하여 그 책 이름을 방약합편이라고 하였는데 의가에서 널리 중용 되었다. 고종 때 군수를 지낸 바 있으며 저서로는 신식 유서필지, 달도 집주 대전이 있다
문헌 조선 도서 해제, 한국 인명대사전 창원 황씨 족보 진단학회 한국사.
순교자 황사영 선생
1775년 영조 51년 을미년~ 1801년 순조 원년 신유년 조선 천주교 순교자 자는 덕소 본관은 창문 고려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해산 부원군 석기의 후손 이요 한림 서범의 아들로 정약현(정약현= 약용의 맏형)의 사위이다.
1790년 정조 14년 경술년 15세에 진사시에 급제하고 제가이 인도로 천주교도가 되어 1794년 정조 18년 갑인년 예 우리나라에 들어온 중국인 신부 주문 모에게 사사하고 알렉산드라는 교명을 받았다 1801년 순조 원년 신유년 신유박해 때에 제천 배론 산 중에 피신 중 토굴 속에서 주문 모가 입국 후부터 신유 박해에 이르기까지의 교세 및 박해에 대한 상황과 또는 외세를 빌어 천주교를 우리나라에 널리 펼칠 방책 등을수서, 높이 한자 새치에 비단에 만 3천 여자의 다라는 글을 순 한자로 적어서 동지 황심 옥천희로 하여금 그래 가을에 떠나는 동지사 일행을 따라 북경에 가서 북경에 있는 구베아= 양 사 선 에게 전달할 계획을 세웠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황심 등과 함께 체포되어 같은 내 11월에 세 사람이 모두 사용되었다.
이 밀수를 황사영 백서 라하며이 사건이 있은 후 천주교에 대한 당국의 박해가 한층 더 심 하였으며 더욱이 선생의 집은 거의 멸문의 화를 당하였다
유물 황사영 백서 원본은 로마 교황청의 소장되어 있고 0 4 1 4 보는 본 종친회 소장하고 있는데 희세의 명필이 다
문헌 순조실록 조선 기독교급 외교급, 한국천주교회사 산구정지의. 황사영 백서지 연구 한국 인명대사전, 창원 황씨 족보
승정원 승지공 황 상로
1683년 숙종 9년 개년~ 1739년 영조 15년 개미년
조선 문신 자는 인덕 본관 창문 고려 문하시랑 동중서 문학경기장 4 회산 부원군 석기의 후손 이요 군수 하신의 아들이다.
1711년 숙종 37년 신묘년에 진사시에 급제하고 1733년 영조 9년 계축년 식년문과 병과로 급제하고 벼슬이 누진하여 사간원정언을 그쳐 승정원 승지의 이르렀다 정언으로 있을 때 공의 스승 우암 송시열의 변무사 항소를 하였고 또 신,임사화 때에 공의 아버지 하신이 군수로 있으면서 역모로 몰려 장형을 당한 일이 있었는데 이를 변무하여 신관 복관이 되었다.
충의 위장 공 황윤
1790년 정조 14년 경술년~ 1,800고종 6년 기사년 조선 무신 자는 원세 본관 창원 의원군 거정의 후손이요. 인복의 아들이다.
1816년 순조 16년 병자년 진사가 되고 1822년 순조 22년 임오년 무과에 병과로 껍질 하여 용량이 부사정이 되고 1825년 순조 25년 을유년 용량이 사정이 되고 1828년 순조 28년 무자년 용량이 부사과가 되고 1835년 헌종 원년 을미년 의성위 부사직이 되고이듬해에 훈련은 판관이 되고 1840년 헌종 6년 경자년 5위 사직이 되고 1844년 헌종 50년 갑진년 정병위 부호군이되고 1847년 현종 13년 정미년 정병위 호군이 되고
1850년 철종 원년 경술년 훈련원 정이 되고 1853년 철종 4년 계축년 중추부 참 지사가 되고 1856년 철종 7년 병진년 예 동지중추부사 겸 충의 위장이 되었다.
문헌 창원 황씨 족보
이조참판 백옥공 황호민 1789년 정조 13년 기유년~ 1866년 고종 3년 병인년 조선 문신 자는 이경 호는 백옥 본관 창원 고려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회산 부원군 석기 후손이요.
증 이조참판 전의 아들이다 1816년 순조 16년 병자년에 정시문과에 급제하였다 그 후 벼슬이 누진하여 가선대부 이조참판이 되고 1850년 철종 원년 경술년 철종 승통시에 예관이 되어 강화도에 가서 7종을 모시고 궁으로 돌아왔다. 그 후 강화 유수가 되었다. 공무원 성품이 개결하고 덕의가 있으며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한고 문장에도 이름을 떨쳤다.
문헌:창원 황씨 족보
승정원 좌부승지 공 황인하
1811년 순조 11년 신미년~ 1885년 고종 22년 을유년 조선 문신 자는 유선 본관은 창원 동지중추부사 신의 아들이다.
1848년 헌종 14년 무신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에 이어 청정원가주서 등을 역임하고 1866년 고종 3년 병인년에 문과 중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당상관이 되고 5295 군을 거쳐 병조참지가 되었다가 승정원 우부승지 좌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문헌 대계유고 한국 인명대사전, 창원 황씨 족보
의사 황상기 선생
1829년 순조 29년 을축년~ 1868년 고종 5년 무진년
의사 초명은 효기 송관 창문 고려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회산 부원군 석기의 후손 이요. 치희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용모가 준수하고 성질이 강직하여 성장 함에 이르러 담력이 과인하고 정의감과 의협심이 출동하였다.
1668년 현종 9년 무신년 본읍 칠원 현감 조현택이 탐학무도 하여 가든 햄버거 가렴주구를 일삼으니 민원이 충천하여 민요 발기의 징조도 없지 않았다. 선생님 군민들의 혹리추방에 대한 거사 모의를 자담 하고하루는 단신으로 화면에 들어가서 오리를 축출 하자는 대갈일성을 외치며 현감 조현 택을 한 팔에 끼고 끌어내어 그 죄상을 말하면서 낙동강변 상포진에 추방하였다 이날이 마침 칠원 장날이라 많은 민중이 그 장거에 환호성을 외치며 호응하였다.
줘 현택이 가만히 도성에 가서 사건의 전말을 제 나름대로 보고하자 조정에서 조현태의 친척 되는 조창영을 안 역사로 현재 보내게 되니 줘 창녕은 사건의 진상 조사는 덮어놓고 조현택 사원보복에 혈안이 되었다 밤중에 수십명의 폭도를 이끌고 선생의 고장인 유동 부락에 잠입하여 사방에서 방화를 하면서 화염을 피하여 탈출하는 부락민을 함부로 구타하였다.
그 당시 이부락에 거주 하는 사람은 그의가 황씨 엽기 때문에 황씨 였기 때문에 맞은 사람은 유동 황씨라는 말이 생겨 지금도 그런 말이 전하여지고 있다. 이때 창원군수 윤영하가 칠원 사람으로 조장혁의 폭거에 대한 사전 흉모를 알고 유동 부락이 미리 밀통 하였던 관계로 주민 대다수가 피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옥은 술에 코가 전소되어 전화 불행 중 다행으로 인명피해는 적었다 .
그 후 선생은 관에 자수하여 말하기를 조현택의 악행은 군민이 모두 알고 있는 바이오 . 조현태의 추방은 나의 단독으로 일이다 라고 하였으며 그사이에 동조한 사람에 대하여는 일체 언급하지 않고 끝내 단독으로 1이라고 주장하다가 꽃무늬 극심하여 지자 저를 물어 끊어서 다른 사람에게 화가 미치지 않게 하였다 마침내 형륙을 당하게 되니
국민들이 선생의 높은 인품과 굳센 의지에 대하여 경모와 애석함을 금치 못하였다.
1956년 병신년에 칠원 명륜당으로부터 포상이 있었고 그 후에 그 지방 민들이 모여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문헌 황 의사 기념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