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조목종

황유중, 황경중, 황자중, 황용정 황이중, 황청, 황덕민, 황절, 황수

qndns 2020. 3. 2. 18:46

 兵曹佐郞 釣臺 公 黃有中

1564년 명종 19년 갑자년~ 1620년 광해군 12년 병신년 조선 문신 자는 중정 호는 조대 본관은 창원 大司憲  섬의 아들이다

 일찍이 庭試文科에 급체 하였으나 당시 試官이든 공의 아버지가 자기 아들의 글을 알아보고 급제 된 것을 취소했다. 그 뒤의 蔭補로 登用되어 1605년 선조 38년 을사년에 敎官으로 生員試에 合格하였다 1606년 선조 39년 병오년에 增廣文科에 을과로 급제하고 그 이듬해에 成均館  典籍 兵曹佐郞 지내고 弘文館의 등용 되었으며 1608년 선조 41년 무신년에 領議政 柳永慶이 永昌大君을 世子로 擁立 하려고 했다고 하여 鄭仁弘 李爾瞻등 奸臣輩의 謀陷으로 領議政 柳永慶이 慶興으로 流配되었다가 이어 사사 되자 領議政 柳永慶의 처남인 공의 아버지 暹도 罷職되었다 이에 공도 벼슬을 버리고 아버지를 따라 고향인 豊基 隱居하였다 그 후에 조정으로부터 司諫院 正言 헌납 참의 등에 취임을 요청받았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문헌: 선조실록 한국인 물고 창원 황씨 족보 한국인명대전 


 昌原 副使 오촌공  황경중


 1569년 선조 2년 기사년~ 1630년 인조 8년 경오년  조선 문신 자는 직지 호는 오촌  본관은 창원 현감 수의 아들이다.

 일찍부터 시문에 능했는데 1602년 선조 35년 임인년에 別試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이듬해에 藝文館 檢閱이 되고 1604년 선조 37년 갑신년의 藝文館 待敎와 承政院 注書로 歷任하였고  1608년 선조 41년 무신년에 司諫院 正言 獻納 등을 거쳐 兵曹正郞 弘文館 修撰 成均館 典籍 司諫院 獻納을 지내고 이어서   兼司書가 되었다

 이때 關東지방에 水害가 심하여 많은 이재민이 났는데 공이 어사가 되어 이재민  구휼에 많은 공을 세웠다. 1611년 광해군 3년 신해에 사신으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僉知中樞府事가 고1615년 광해군 7년 월 몇 년에 오이 都摠府 副摠管이 되었다가 忠淸道 觀察使가 되었고 1617년 광해군 9년정사년에 內艱喪그 이듬해에  外艱喪을 당하여 상례를 마치고 1621년 광해군 13년 신유년에 오이 도총부총관이 되었으나 대북의 횡포로 사직하고 은거하였다. 1624년 인조 2년 갑자년의 고향에서 李适의 난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行在所에 가서 坡州 牧使가 되어 9개월 동안 在任하면서 많은 치적을 남기고 金海 原州 牧使 를 거쳐 창원 부사로 재직중 서거 하여 철원 유천에 반장 하였다 .

문헌 :선조실록 광해군일기 분봉 집 창원 황씨 족보 한국 인명대사전


 咸鏡道 水軍節度使 공 황 자중


 1571년 선조 4학년 신미년~  1631년 인조 9년 신미년 조선 무신 자는 도천 본관은 창원 의원군 거중에 7대 손이요 좌랑 성의 아들이다.

1606년 선조 39년 병오년에 武科에 갑과에 及第하여 正兵衛 司果가 되고 1609년 광해군 원년  을류년에 忠佐衛 司直이 되고 1611년 광해군 3년 신해년에 通川郡守가 되고 1613년 광해군 5년 계축년에 豊基郡守 가되고 1615년 광해군 7년 을묘년에 訓練院 僉正이 되고 이듬해에 甲山 都護府使가되고  1617년 광해군 9년 정사년에 咸鏡道 水軍節度使가 되었다가 1619년 광해군 11년기미년에 官職을 辭任 하였다 

문헌 창원 황씨 족보



 湖南 水軍節度使 공  황 용정

 1572년 선조 5년 임신년~ 1633년 인조 11년 계유년 조선 무신 자는  유직  본관은 창원 고려 문하시랑 동중서 문화 평장사 회산 부원군 석기의 후 손이요,  통덕랑 임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學業을 좋아하고 부모에 효행이 출중 하였으며 용역이 비상하고 武藝도 숙달 하여 1594년 선조 27년 갑오년에 武科에 及第하여 공이 집에 있을 때 이웃마을에 名馬가 있었는데 말이 너무 猛悍 하여 다른 사람은  御馬 할 수가 없었다.  공이 그 말을 한 번 試乘 하여 본즉  말은 悍習이 조금도 없이 잘 따르므로 그 말을 사서 잘 길들였다 .

1596년 선조 29년 병신년에 宣傳官廳 宣傳官이 되고 1608년 선조 41년 무신년에 秉節 校尉가 되었다가 1610년 광해군 2년 무술년에  唐津浦 萬戶로서 定略 將軍이 되고 이듬해 禦侮將軍으로서  義州 水口 兵馬 萬戶가 되고 1615년 光海君 7년 을묘년에 년에  5위 副司果를 거쳐 加德助羅浦병마만호가되고  1620년 광해군 12년 경신년에 折衝 將軍으로서 阿耳鎭  僉使가  되고 이듬해에 平安道 兵馬虞侯兼 安州 節制使가되고 1623년 인조 원년 계해년에 渭原 郡守가 되어 善政을 베풀었으며 이듬해 李适이 構亂을하자 關西 體察 副使  李時發과 合勢하여 安峙 戰鬪에서 적을 대파 하였는데 있대 승용 한 말이  전날 얻은  名馬였다. 이 戰鬪에서 體察 副使 이시발이 말해서 떨어져 危境의 빠진 것을 공이 救出하여 준 관계로 그의 아들 삼형제와 결의까지맺었다.1627년 인조 5년 정묘년에  定州 牧使가 되어 善治에 공을 세우고 상을 받았으며, 1631년 인조 9년  신미년에  湖南 水軍節度使가 되어  그 맡은 職責을 잘하여 稱頌이 자자하였다

 문현 창원 황씨 족보


 訓練院 都正公 黃履中


  1574년 선조 7년 무술년~ 1646년 인조 24년 병술년 조선 무신 자는 정부 본관은 창원 의원군 거정의  8대손이요. 佐郞 승의 아들이다. 1592년 선조 25년 임진년에 19세의 소년으로 濟用監 奉事가 되었다. 이때에 왜구의 침입으로 임금이 파천 하게 되자 어가를 扈從 하였고 그 이듬해에 武科에 급제하여 平安道 兵馬 節制都尉가 되고  1596년 선조 29년 병신년에 世子翊衛司 左衛率이되고  1598년 선조 31년 무술년에 오위 司果가 되고  1600년 선조 33년에 오위  司直이되고  1602년 선조 35년 임인년에 中樞府 經歷이 되고 1605년 선조 38년  을사년에 龍양危護軍을 거쳐 訓練院 副正이 되고 1608년 선조 14년 무신년에 忠武衛上護軍이 되고 1611년 광해군 3년 신해년에 訓練院 正이되고  1614년 광해군 6년 갑인년에 忠義衛 上護軍이 되고 1617년 광해군 9년을 4년에 訓練院 都正이 되었다.

문헌 창원 황씨 족보



 性理學者 敬菴 선생 黃淸

 學者 자는 응호 호는 경암 본관은 창원 고려 문하시랑 동중서 문화 평장사 회산 부원군 석기의 후손이며 陽城縣監  致身의 아들이다.


 선생은 幼時로부터 才質이 聰明하여 8세때에 조부의 말씀이 배우지 않으면 사람구실을 할 수 없는데, 어찌 범상한 사람 같이 살다가 그냥 죽을 수가 있겠느냐? 하니 아무 말 없이 느끼는 바가 있는 듯 하였다. 그 이튿날 조부가 시험적으로 小學初卷가르치니  解得과 發音 등이 分明하여 成熟한 사람과 다름이 없었다. 선생의 조부는 驚異하여 말하기를 너는 훗날에 큰 선비가 되리라고 하였다.  그로부터 선생은 發憤忘食 하고 면학하여 십세에 경서를 通達하고 아버지를 섬기는데 효성을 극진히 하고 상을 당하여는 주자에 가례의 어긋남이 없었다.


17세 때에 進士試에 及第하여 建元陵參奉이 되었다.  桐溪 鄭온과 交誼가 두터워서  證票로 필통을 교환한 일이 있었다. 선생은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晋州 동쪽 防禦山 밑에 있는 덕암에 은거하면서 終年까지 주로 性理學을 공부하였다  

문헌 창원 황씨 족보


 義兵將  黃 德民 先生

 1578년 선조 11년 무인년~ 1677년 숙종  삼년 정사년  조선 문신 자는 자일 본관은 창원고려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회산 부원군 석기의 후손이다.

 어려서부터   姿質이 英豪 하고 氣像이  俊邁 하여  凡兒와 다른 점이 많았다.

 여럿이 모여서 유희를 할 때 자기 기분에 맞지 않으면 決然이 그 자리를 떠났다. 어떤 일이 있어도 다른 사람에게 屈從 하지는 않았다. 孝誠이 至極하여 14세 임진년에 父喪을 당하자 執喪 하는 凡節이 어른과 다를 바가 없었다. 1592년 선조 25년 임진년에 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임금이 文臣을 시켜 八路 唱義 勤王兵을 호소하는 榜文을 써서 四方에 붙이자 그 방문을 보는 사람은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하여 많은 壯丁들이 義兵으로 모여 들었다. 당시 공은 負傷을 당하여 검屍中에 있었는데  왜 적이 줄지어 殯所에 들어오므로 선생이 영구를 안고 放聲大哭을 하니  적이 이상이 여기고 도망을 쳤다

 공이 3종 조인 僉正  黃景憲을 보고 從祖는 3대의 조정을 섬기면서 임금의 眷寵을 받았는데이 亂國을 당하여 어찌 倡義를 하여 적을 討伐 하지 않는가?한즉 경헌이 말하기를 내 마땅히 義兵을 일으켜 적을 토벌하여 一死報國 할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晉陽에서 義兵을 募集 하였는데 공은 어머니를 없고 從軍을 하니 박사겸,이로 등이 선생의 효성에 감동하여  어육등을 공급하였다. 이 때 牧使 이경이 적이 두려워서 도망을 가서 숨는 꼴을 보고 선생이 말하기를 국운이 불운하여  임금은 도성을 버리고 지방으로 蒙塵을 하고 백성은 어육과 같이 비참하게 되었다. 이때야 말로 忠臣 義士가 몸을 犧牲하여 하여야 할 때인데 牧使는  國恩을 입고 있으면서 어찌 이난을 앉아서 보고만 있는가? 하니 경은 머리를 숙이고 부끄러워 하였다. 공은 나중에 종군 하면서도 삭망에 哭祭를 걸른 일이 없으니 이를 보는 사람은 모두 稱讚하였다. 丁酉再亂이 일어나자 선생이 종조 황경헌에게 글을 보냈다. 지금 왜적이 乘勝長驅 쳐 들어와 朝廷의 領이 사방에 미치지 못하니 참으로 痛歎할 일입니다. 曾祖父께서 義兵을 이끌고 적을 토벌하여 큰 공헌을 세우게 되면 이는 國家의 다행한 일이요, 生民의 慶事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글을 받은 황경헌 조정의 허락을 얻어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적을 토벌 하다가 天香山城에 진을 치고 있었다. 공이 소식을 듣고 달려가서 죽음으로서 같이 지킬 것을 맹세하니 지방의 인사들이 그  忠과 勇에 경복하였다.

 이때 공은 都體察使 李元翼에게 글을 보내기를 國家의 祿을 먹는 臣下로서 오랑캐를 무찌르지 못 하면 조상전래로 지켜오던 疆土를 빼앗기게 되었으니 이 때를 당하여 신하되는 자는  죽을 힘을 다하여 그 자리를 지켜야 할 때다.  라는 서장을 보냈다.  都體察使 李元翼이 書狀을 받아 보고 이를 장하게 여기어 府兵 2000명을 공에게 주니 이예 공은 비로소 힘을 얻게 되었다.

 그의 7월에 우리나라 군사가 폐하였다는 情報를 듣고 從祖父 경헌과 함께  黃石山城의 駐屯하게 되었다. 이때 적의 공격이 심하여 守城將 白士林이 도망하자 성은 드디어 함락되고 縣監 郭준 郡守 趙宗都가 殉死 하였다. 이때 황경헌도 화살이 떨어져서 더 싸울 수가 없게 되자 殉節하고 말았다. 

공은 金烏山城으로 진지를 옮기어 병력을 보완하고 난민을 구휼 하니 병졸의 사기는 왕성하여지고 飢民은 四方에서 모여 왔다.  공은 년로 하면서도 德氣가 얼굴에 가득하고 氣像이 淸秀하여 仙風의 威容이였다 1677년 숙종 13년 정사년에 99세의 高齡으로  逝去 하니  大질로서 종이품 嘉義大夫 漢城府判尹 昇敍 하였다.

문헌 창원 황씨 족보


 同知中樞府事 公   黃 浙


 1582년 선조 15년 임오년~ 1644년 인조 12년 갑신년  조선 문신 자는 자파 본관 창원 의원군   거정의 후손이요. 主簿 성해의 아들이다

1614년 광해군 6년 갑신년에  式年문과에  丙科로 及第하여 宣傳官이 되고 1616년 광해군 8년 병진년에 奉常寺 奉事를 거쳐 議政府  司祿이되고 1618년 광해군 10년 무오년에 宗親府 直長을 거쳐 承政院 注書가 되고 1621년 광해군 13년 신유년에  刑曹律學敎授가 되고 1624년 인조 2년 갑자년에 漢城府 主簿가 되고 이듬해 司諫院 正言을 그쳐 水原府判官되고  1627년 인조 5년 정묘년에 全州 判官이 되었다.

1630년 인조 8년 경오년에 敦寧府僉正이되고 그 이듬해에 成均館 司成이 되고 1633년 인조 11년 계유년에  吏曹參議를 거쳐 弘文館 直提學 되고 1635년 인조 13년 을해년에 敦寧府  都正이되고 1638년 인조 16년 무인년에 同知中樞府事 가 되었다.

 1640년 인조 18년 경진년에 관직을 사임하는 고향에 돌아와 性理學 연구에 주력했으며 후진 育成에 힘썼다.

 문헌 창원 황씨 족보


 兵馬節制使공  黃수

 1587년 선조 20년  정해년 1652년 효종 3년 임진년 조선 문신 자는 행원 본관은 창원 고려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회산 부원군 석기의 후손 이요. 觀察使 시경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才質이 특이하여 弱冠에 학업이 大成 하였다.  1610년 광해군 2년 경술년에 進士試에 급제하고 1618년 광해군 10년 무오년에 庭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 후 驪州 牧使 등 四州에 牧使을 거쳐 廣州 兵馬節制使를 지냈다 嘉善大夫 吏曹參判 弘文館 提學 世子侍講院 左副賓客에 增爵 되었다.

문헌 한국 고사 대전 창원 황씨 족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