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조목종

창원 황극중 황치경 황서 황익중 황시 황국룡 황찬 황근중 황운성 황신.

qndns 2020. 3. 2. 14:04

安東大都護府使  공   황 극중

 1552년 명종 7년 임자년~ 1592년 선조 25년 임진년 조선 문신 자는 하남 본관은 창원 의원군   거정의 후손 이요  판관 선의 아들이다.

  1576년 선조 9년 병자년에 生員이 되고 1588 선조 18년 을유년의 別試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弘文館校理가 되고 이듬해에 弘文館 副應敎가 되고 1588년 선조 21년 經筵 侍講官이 되고 1592년 선조 23년 경인년에 春秋館 編修官이 되고 1592년 선조 25년 임진년에 安東大都護府使 就任하였다가 이듬해 6월에 서거하였다 吏曹參判 兼 오위 都摠府 副摠管에게 贈職 되었다.

 문선 창원 황씨 족보


 功曹參議   몽죽공  황치경

 1554년 명종 9년 갑인년~ 1627년 인조 5년 정묘년 조선 문신 자는 이직, 호는 몽죽 본관은창원, 대호군 대임의 아들이다.

 1579년 선조 12년 김연의 生員試에 합격하고 이듬해에 別時文科 병과로 급제하여 司憲府持平 執義가 되고 1591년 선조 24년 신묘년의 성절사 김응남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592년 선조 25년 임진년 壬辰倭亂이 일어나자 京畿道觀察使 권징의 從事官으로  軍糧米 조달에 많은 공을 세웠으며1594년 선조 27년 갑오년에 坡州 牧使가 되고 1597년 선조 30년 정유년에 接伴官으로 명나라 使臣을  接伴 하였다.

 1600년 선조 33년 경자년 예 鐵山軍帥가 되고 1604년 선조 37년에 富平副使가 되고 그 다음에 南原副使를 그쳐 安州 牧使가 되고 1608년 선조 41년  무신년에 文科重試에 병과로 급제하고 戶曹 參議와 功曹 參議을 歷任하였다 咸鏡道 兵馬節度使로 추천받았 으나 大北派의 妨害로 任命 받지 못하고 그들의 모함으로 말미암아 逮捕되어 投獄되었다가 領敦寧府使 심희수의 辯護로 釋放되었다.

 1624년 인조 2년 갑자년에 李适의 亂 때에 春川副使로서 군사를 이끌고 솔선하여 왕을 扈從 하였으나 난이 평정된 후 誣告으로 연안에 유배되었다가 그해 겨울에 풀려 나왔으며 1627년 인조 5년에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복직되어 京畿道   呼召使로  義兵을 召集하여 전쟁 준비를 하였으나, 그 외 3월에 금나라와 和戰이 成立되어 전쟁을 중지하였다.

문헌: 선조, 인조실록 한국인명대사전, 창원 황씨 족보


坡州 牧使  종고 공  황서

 1554년 명종 9년 갑인년~ 1606년 선조 39년   병오년 조선 문신 자는 광원 호는종고 본관은 창원 右贊成  사우의 증손이오  훈도 여규의 아들이다.

 성품이 강직하고 학문을 좋아하였다.  1576년 선조 9년 병자년에 進士試에 及第하고 1580년 선조 13년 경진년에 謁聖科에 급제하였다. 그후 輸城 察訪이 되었다가  1592년 선조 23년 경인년 神靈 縣監이 되고, 그 이듬해에 尙州 牧使로 승진 하였으며  1597년 선조 30년 정유년에  司瞻寺 正을 거쳐 坡州 牧使가 되었으나, 모함한 자가 있어 얼마 못 가서 罷免 되었다 1608년 선조 41년 무신년에 承政院 都承旨에 증작 되었다.

 주스 종고 문집

 웃는 창원 황씨 족보 한국 고사 대전


 司諫院 司諫  만취 공  황익중

 1554년 명종 9년 임인년~ 1628년 인조 6년 무진년 조선 문신 자는 숙정  호는 만취  본가는 창원 의성군 거정의 후손 이요 藝文館 奉敎 위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1592년 선조 23년 경인년에 백사 李恒福의 권유로 進士試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은 하지 않고 있다가 1614년 광해군 6년  공의 회갑이 되는 해에  增廣 文科 병과로 급제하여  弘文館 應敎가 되고 그 이듬해에 司憲府 掌令을 그쳐 經筵 侍講官이 되고 1617년 광해군 9년 정사년 司諫院는 司諫이 되었으나 政局이 混亂하여 지자 官職을 사임하는 고향에 돌아왔다

문헌 창원 황씨 족보


 承政院 承旨 負暄堂공  황시

 1555년 명종 10년 을묘년~ 1626년 인조 4년 병인년 조선문신 자는 시지, 호는 운계 부훤당공 본관은 창원 同知 敦寧副使 은규의 아들이요 大司憲 섬의  아우이다.

 1579년 선조 12년  기묘년 司馬試에 합격하고 親試文科에 급제한 후 1594년 선조 27년 갑오년에 兵曹正郞과 司憲府持平을 거쳐 弘文館 修撰 應敎 知製敎 등을 역임하였으며 1596년 선조 29년 병신년에  世子 侍講院 輔德에이어 成均館 司成을 지내고  그 뒤에 靑松 副使로 선정의 공이 컸다 1601년 선조 34년 신축년에 사재감 정리되고  1604년 선조 37년 갑진년에 司憲府執義 일을 그쳐 弘文館 副提學   되고 이듬해 兵曹參議 가 되고 承政院 乘志로 千秋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어 壬辰宣武功 二等에 錄名되었으며 1607년 선조 40년정미년에 掌隸元 判決事과가 되었다가 광해가 집권 하자 사퇴하고 竹溪에서 10년 동안 은거 하고 있다가 1623년 인조 원년 계해년에 仁祖反正이 되자 다시 벼슬에 나와서 三陟 副使로 있다가 辭任하였다.

  저서 조천록 부훤당집   운계집

  문헌 조선실록 한국 인명대사전 창원 황씨 족보



 訓練院 副正   서은공  황국용

 출생년도 미상~ 1632년 인조 10년 임신년 조선 무신 자는 국룡,  호는 서은,  본관은 창원

 고려문화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회산 부원군  석기의 10세 손이다.

 어려서부터 무예를 좋아하여 일찍이 武科에 及第 하였다.

 1592년 선조 25년 임진년에 原從功臣으로 定略 將軍이 되고 벼슬은 訓練院 副正에 이르렀다 공을 추모하기 위하여 1960년에 후손들이 月城郡 山內面 智里에 西隱亭을 建立하였다.

 문헌 창원 황씨 족보


 成均館 司藝 공  황찬 

1555년 명종 10년 을묘년~ 서거 연대미상 조선 문신 자는 경윤, 본관은 창원 宗親府 典典籤   탕경의 아들이며  증  判東寧府事  진의  아우이다.


 1576년 선조 9년 병자년에 생원이 되고 1580년 선조 13년 경진년에 謁聖文科에 병과로 급제한 후 1592년 선조 24년 신묘년에 成均館 司藝가 되었다.

 1592년 선조 25년 임진년에 壬辰倭亂이 일어나자 咸鏡道 召募使가 되어 軍糧調達과 義兵募集에 힘썼다.  이해의 조정의 제출한 보고서가 잘못되었다. 하여 罷職되었다.

 문헌: 선조실록 국조방목 한국 인명대사전 창원 황씨 족보



 觀察使  月灘공 황근중


 1560년 명종 15년 경신년~ 1633년 인조 11년 계유년  조선 문신 자는 일지, 호는 월탄 본관은 창원  永春 縣監 수의 아들이다.

 1589년 선조 22년 기축년에 生員試에 合格한 후 蔭補로 公助와 互助의 正郞을 역임하고 1606년 선조 39년 병원에 增廣 文科에급제하고  慶尙道都事가 되고 1608년 선조41년 무신년에 司憲府 持平을 그쳐 光海君이  卽位하자 五衛副司直으로 있다가 그뒤 錦山 楊根郡守로 나아가 많은 治績을 올리어  安邊 副使가 되었다.

 1615년 광해군 7년을묘년에 承政院 同副承旨가 되고 그 후에 江原道 全羅道 觀察使를 지냈다. 官職을 仕退한 후 鐵原에 滄浪 亭子를 건립하고 餘生을 보냈다

문헌: 광해군일기 한국인물고  한국 인명대사전 창원 황씨 족보 


弘文館  提學공 황운성

 1560년 명종 15년 경신년~ 1630년 인조  8년 

조선 문신 자는 희서  본관은 창원 의원군 거정에 후 손이요. 功曹 正郞 元祖의 아들이다.

 1582년 선조 15년 임원에 進士試에 合格하고 1588년 선조 21년  무자년에 繕工監 奉事가 되고 1592년 선조 24년 신묘년 繕工監 直長이 되고 이듬해에 承文院 博士가 되고 1596년 선조 29년 병신년에 惠民署 主簿가 되고  1600년 선조 33년 경자년에 內侍府 尙洗가 되고  1603년 선조 36년 계묘년의 尙衣院 判官이 되고 1607년 선조 40년 정미년의 禮曹正郞이 되었다. 1611년 광해군 3년 신해년에 軍器사 僉正이 되고 1614년 光海君 6년 갑신년의 弘文館 應敎가 되고 1616년 광해군 10년 후 5년에 弘文館 典翰 되고 1621년 광해군 13년 신유년에 弘文館 直提學이 되고 1624년 인조 2년 갑자년에 弘文館提學이 되었다

 문헌 창원 황씨 족보


戶曹判書 문민공  황신

 1562년 명종 17년 임술년~ 1617년 광해군 9년 정사년  조선 문신 자는 사숙 호는 축포 본관은 창원 고려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회산 부원군 석기의 후손 이요. 정랑대수의 아들이다

공은 嬰兒 시부터 재질이 비범하고 聰明이 出衆하여 文字를  능히 解讀 하였으며 장성 함에 따라 讀書를 할 때면 한꺼번에 八,九行을 읽어 내려갔다.

 1571년 선조 4년  신미년 공이 열 살 때 父喪을 당하였는데 애통함이 성인과 같아 弔客들로 하여금 눈물 없이는 참아 볼 수가 없었다. 부상후 淸貧 하여  모 부인이 길삼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아들을 가르침에 있어 嚴師와 다름이 없었다.  12 ,3세때 학업이 大成하여 원근 각지에서 명성이 자자한이 많은 사람들이 사귀기를 원하였다.  특히 秋灘 吳允謙 과 교의가 깊었다.1582년 선조 15년 임오년 21세 때 進士試에 及第한 후 牛溪 成渾에게서 修業 하였는데 牛溪 成渾이 공의 큰 그릇됨을 중하게 여기게 되니 동문학들이 스스로가 미치지 못하였다.  이때의 雪竹詩를 지은봐 있는데 우게 성혼이 책상에 걸어놓고 칭찬하기를 시중에 높은 뜻이 있으니 가히 조달 하리라 하였다.  그 후 1587년 선조 20년 정해년에 栗谷 李珥에게 修業 하였는데 그 이듬 해 27세때에 뒤에 謁聖 文科에 首席으로 及第하여 義盈庫 主簿 陞宣敎郞이 되고 6월에 司憲府監察이 되었다.

 1589년 선조 22년 기축년 2월에 陰竹  縣監이 되었다가 4월에 辭退하고 집에 돌아왔다가 5월에 다시 成均館 學官이 되고 10월에  北道  兵馬評事 를 거쳐  12월에 兵曹佐郞이 되었고 이듬해에 12월에 兵曹佐郞 兼  知製敎가 되었다.

 당시에 表箋敎冊이 거의가 공의 손에 나오게 되어 칭찬이 자자하였다. 이해 4월에 司諫院 正言이 되었는데 鄭汝立의 옥사 때 鞠聽大臣들이 서로 回避하고 直言을 하지 않는 失策을 論駁한 것이 임금의 뜻이 그슬린 바가 되어 5월에 高山 縣監의 左遷되었다. 

1591년 선조 24년 신묘년 3월에 春秋館 記事官이 되었는데 이때의 중신간의 왕세자책봉을 문제가 거론되고 있었다. 왕세자로는 後宮所生 많이 있으므로 그 중 똑똑한 왕자를 가려서 왕세자로 삼아 후사를 이어가도록 하기로 방침을 작정하고 鄭澈 李山海 柳性龍  등이 함께 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산해가 배신 하여 후궁 김비의 형 金公諒과 밀 탁하고 鄭澈 등이 信誠君 母子를  殺害 하려 한다고  浪說을 퍼뜨리는 한편 김비는 재빨리 임금에게 漏訴 하여 宣祖의 마음을 흔들어 놓고 있었다. 이때 鄭澈이 建儲問題를 내어 놓자임금이 激怒하여 呈徹을 晋州에 有胚 하였다가 다시 江界로 移配 하자 공은 정철의 일파로 몰리어 罷職된 江華島 산골에 물러가 休養하고 있었다. 1592년 선조 25년 임진년에 壬辰倭亂이 일어나자  그해 7월에 다시 起用되어 世子侍講院 司書가 되었다가 곧 兵曹佐郞을 거쳐 그의 8월에 司諫院 正言兼 世子侍講院 司書 가 되고 1593년 선조 26년 계사년 정월에 春秋館 記事官으로 중국 使臣 손경략  웅창의 반사가 되어 의지의 가서 중국 사신을 맞이하였다.

이해 2월에 弘文館 전적 兵曹佐郞이 되고 6월의 漢城 敎授가 되고  8월에 司憲府持平이 되었는데 이해 9월에는 송경락등을 義州까지 傳送하고  도체찰사 李恒福의 從事官으로 世子 光海君 따라 南下 하였다 1594년 선조 27년 갑오년 정월에  承文院 敎理가 되고  8월의 都體察使 尹斗壽의 從事官이 되고  1592년 선조 28년 을미년 1월에 司憲府掌令이 되고 그 외 4월에 司籤 司正 侍講院 文學兼 承文院 敎理가 되어  熊川 倭營에 갔다. 이때 倭 나는 잠시 停戰이 되어 청나라 將帥 沈惟敬  倭營에 머물러 있으면서 和箏를 주선하고 있었는데 우리 측에서 거기 배석 하기 위하여 공이 가게 되었던 것이다.약 2년 동안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청나라 장수를 應待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倭將에 응수 하면서 敵情을 探知하고 사세를 판단함에 명민아여 조정과 국민의 신뢰가 컸다 다음에 정월에 倭營으로 부터 朝廷해 돌아오니 

折衝將軍 行龍讓衛  副護軍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4월에 다시 왜영에 가서  지금  蠢動을   막었다

 黃廷彧이 呼召使가 되어 王子와 함께 鐵原에 가서 義兵을 일으켜 倭敵을 討伐할 때 嶺南과 湖南地方에 보낼 呼訴文 作成을 공에게 청함으로 공이 基礎하였다 

그 구절에 조정에서 日本과 和親을 주장하는 자가 있으니  이런 만고에 용납할 수 없는 자라고 한 것이 당시에 대신들에게 몹시 그슬린 바가 되어 危地倭營 두 번이나 갔다 왔으며뒷날 일본에까지 가게 되었고 난 지인 全羅監事 監司로 나가게 된 것이다. 이때의 청나라 使臣 楊邦亨과  沈惟敬은 먼저 日本에 가 있었는데  일본 측에서는 조선 사신이 오지 않은 것을 트집 잡아 休戰協定에 응하지 않으므로 조정에서 일본에 보낼 사람을 물색  하니  공이 가장  適任者라하여, 그해 8월 02 敦寧府 도정으로 通信使로 임명되어 副使 朴弘長이하 309 명을 데리고 일본에 가게 되었다 

 공이 출발에 즈음하여 읊은 시에

大丈夫는 不백死 백사는 非丈夫라 白刃은 尙可답요 鼎앵도 尙可趨라

所願이 全五節이니 安得全五軀요 賢哉라 조述郞은 抵死心不유라  하였다

 팔을 4일 出帆하여 8월 25일에 배가 一技島中洋에 이르자 風浪이 심하여 破損될 위기에 直面하였다  船中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失神 상태에 빠져 쓰나 공은 조금도 놀란 빛이 없이 泰然自若 하였다. 이때 공은 誓海文을 지어 바다에 던지니 風浪은 가라앉고 배는 무사히 항해 하였다. 윤 8월 18일 일본 幕府에 도착하니 일본 關伯 豊臣秀吉이 使臣의 官爵이 낮고 王子를 보내지 않았다는 등의 이유로 接見은 고사하고 도리어 구류하려 한다고 日本人 요시다가 와서 말하면서 中國使臣  沈惟敬에게  구원을 청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공이  대답하기를 내가 祖國을 떠나 이곳에 올 적에 이미 세 가지 계획을 정한 바 있는데 그 첫째는 協相이 순조롭게 성취되면 中國 使臣과 함께 우리나라의 돌아갈 것이요

둘째는 협상이 되지 않고 나를 拘留한다면  10년이라도 그 고초를 달게 받을 것이요.

 셋째로 倭人이   暴虐을  가하여  殺戮을 당하더라도 조금도 두려워할 바가아니라.내가 이미 이렇게 될 줄 알고 있는데 새삼스럽게 沈惟敬 만날 필요가 없으니 내 이들에게 맡겨둘 따름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니 저희들도 어쩌지 못 하였다. 중국 사신들의 和戰을 成立 시키려고 노력하였으나 豊臣秀吉풍신수길이 끝내 듣지 아니하여 中國 使臣 일행과 같이 歸國하였다.

 공이 일본에 20일을 있으면서 日本측의 무리한 요구  조건이 대하여 하나도 양보하지 않고 엄연한 자세로 始終 不屈 하니 일본측도 공의 忠直正剛함에 감탄하였다.

공이귀국 후에 倭侵이 있을 것을 얘기하고 朝廷으로 하여금 명나라에 來援 請하도록  하였다.

 이게 12월에 備邊司 提調가 되고 嘉善大夫에 올랐다  1597년 선조 30년 정유년  정월에  慰諭使가 되어 密陽에 다녀왔으며  다시  贊劃使로서  都體察使 李元翼   軍門에  다녀왔다.  그해 2월에 軍務로 조정에 돌아온 기회를 타서 倭亂후 처음으로 江華에 계신 母親에게 귀성 하였다. 이달에 接伴使로서  沈惟敬 軍門에 다녀왔다.

 이해 7월에 全羅道 觀察使가 되었다. 이때 慶尙 全羅 양도에 盜賊의 무리가 편만 하여 人心이 兇하게 되자 朝廷 중신들이 공을 亂動중인 임지에보내면서 사병 한 명도 주지 않았다 공은 할 수 없이 서울에 있는 포병 12초 (1초는 약 100명) 와 군량 약간을 요구하였으나 겨우 경력 1초만을 지급받고 임지에 도착하니 南原은 이미 陷落되고 全州가 계속 崩壞되어 전도가 극도로 혼란하여 조정과 연락이 두절되었다. 공은 匹馬로 敗殘병을 收拾하고 義兵을 勵起하여 亂賊을 掃蕩하고 失地를 회복하였다.

 공은 通信使로서 일본에 다녀온 뒤에  慰諭使   贊劃使  接伴使  全羅道 觀察使 등을 지내는 동안 功勳이 많았으므로 同知中樞府事에 올랐다.

 1599년 선조 32년 기해년 정월에 오위 都摠府 副摠管을 겸하였다가, 이해 이월에 功曹參判에 오르고 이어 戶曹參判에 副摠管을 겸하였다.이해 4월에 母喪을 당하여 江華에 돌아갔다. 1601년 선조 34년 신축년의 漢城府 尹이 되었다가 곧 司諫院는 大使館이 되고 다시 備邊司 提調가 되었다. 이해 8월에는 校正廳 堂上이  되고 10월에 司憲府의 大司憲이 되었다 12월에는 鄭仁弘이 朴惺을 시켜  공의 스승인 牛溪 成渾을 謀陷한 것을 辨誣 하다가 임금에 뜻을 그슬린 바가 되어 罷職되었다.

 1602년 선조 35년 임인년 정월의 명조의 謝恩使로 任命되어 明京의 가서 任務를 마치고 9월에 還國 하니 그 사이에 大司憲 鄭仁弘 一派가 牛溪 成渾의 辨誣事件을 덜 추어 공을 謀略하고 彈劾 하여 官爵이  削奪되었다. 이 소식을  國境에 들어오면서 듣고 백의로  강화도 佛原村에 秋風樓를 짓고 成石田 李月沙 등과 함께 풍월을 즐겼다.

 1605년 선조 38년 을사년 4월에 扈聖宣武 原從  功臣 1等에 錄名 되고 1607년 선조 40년 정미년 壬辰倭亂 때에 새운 많은 공이 認定되어 復官이 決定되었으나 相臣 柳永慶이  시행 치 아니하므로 묵살되었다. 事態가 이렇게 되자 공은 夫餘 滄江으로 移寓 하고 날마다 魚釣와 講學에 自適 하니 金沙溪 등 많은 명사들이 相從하였다.

1608년 선조 14년 무신년에 領議政 李德馨이 正使가되고 공은 戶曹參判으로 副使가 되어 陳奏使로 명나라에 다녀오면서 三國志 등 중국 書籍을 많이 가지고 왔다. 이듬해 정월에 資憲大夫에 오르고 同知中樞府事가 되었다. 이해 2월 工曹判書를 그쳐서 9월에 戶曹判書가 되고 12월에 正憲大夫에 올랐다.

 1610년 광해군 2년 경술년에 공의 스승 牛溪 成渾 선생의  誣枉이 풀리지 아니하므로  공무원 벼슬하는 것이 싫어져서 누차 辭表를 넣었으나, 광해군이 듣지 아니하였다. 이해 12월  嘉禮都監 堂上이 되었다 .  1611년 광해군 3년신해년 여러번 辭退서를 넣었으나 임금이 듣지 아니하였다. 당시 공이 戶曹判書직에 있었는데 난 후에 國家財政은 蕩盡 되고 民生은 塗炭에 빠져 있는데, 조정에서는 간신배들이 판을 치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地方의 貪官汚吏가 橫行하여 國家財政이 極度로  窮乏 하였다.

이에 공은 再訂策 六條를 建議하였다. 戶判으로 在職 5년 동안에 課稅를 公平 輕減하고 亂民을 救恤 하니 國民과 稅吏들이 모두 歎服하였다.

 1612년 광해군 4년 임자년 11월에 2등 竭忠盡誠同德贊慕衛聖功臣이되고 懷山府院君에 봉해지자  공이  곧 辭退를 내었으나 불허 하였다.이듬해 5월에  李爾瞻이  銀盜賊 朴應犀로 하여금 領敦寧 金弟南이 仁穆王后의 소생 永昌大君을 임금으로 錐臺 하려한다고 誣告 하여 金弟南은 賜死 되고 永昌大君이 江華로 流配되는 등 癸丑獄事가 일어나자 공이이 사건에 관여되었다는 彈劾을 받고 削職되었다. 이때에 李爾瞻이 공의 歡心을 사기 위하여 은밀히 공을 찾아와서 가진 阿諂을 하였으나, 한 번도 應射 한 바가 없었다. 이렇게 되자 李爾瞻 鄭仁弘 등이 공과 李恒福 金仙源 및 七諸臣을  逆謀로  몰아  계속하여 狀啓를 올리니 光海가 말하기를 愼의  위인이 忠良하고 剛直한데 어찌하여 逆謀에 참여할  리가 있겠느냐 화며 듣지 않으니 李爾瞻이 마침내 죄수 鄭浹을 사주하여 誣告를 하여 甕津에  流配하게 되었다.

 이때의  李爾瞻이 공에 대한 광해군의 뜻이 두터운 것을 알고 은밀히 적소에 사람을 보내 전하기를 공원 비록 나를 저버리나 나는 공을 저버릴 수 없다. 임금이 나에게 묻되 黃愼이 과연 逆謀한 죄가 있느냐고 하니 이것이 바로 生死 榮辱에 갈림길이 아니겠는가? 공이 지금부터라도 나와 같이 일을 하겠다면 임금에게 말하여 免罪가 될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크게 榮達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공원 대답하기를이 몸이 죽을 罪人이 되어 있으면서 어찌 세상일에 뜻이 있을 소냐? 나의 이로움을 위하여 구차히 살려고 하는 것은 옳은 사람의 할 바가 아니다라고 하니, 이이첨이 또 사람을 보내 전하기를 만일 공의자제를 한 사람 나에게 보내면 가히 화를 풀 수가 있으리라 하니, 자재들이 한번 가보기를 원하였으나 공은 보내지 않고 하는 말이 ,나는 생사를 도외시 한지가 이미 오래 그늘 어찌 나의 자제를 奸惡輩의 門前에 발을 들여놓게 하겠느냐? 하고 끝내 듣지 않으니  李爾瞻 이 大怒 하여  論罪가 더욱 급하여 졌다

 공은 이해 시월에 甕津 配所에 와서 5년 동안 適所 문밖을 나가지  않으니  그 지방 사람들은 공의 얼굴을 본 일이 없지만 먼 곳에서 책을 가지고 글을 배우러 오는 學者가 많았다. 1617년 광해군 9년 정사년 3월의 공의 나이 56세에 配所에서 逝去하였다 재직 중 특히  外交와 財政의 敏腕을  발휘하였으며 文章에도 뛰어났다.

 1623년 인조 원년 계해년에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 右議政 兼 領經筵事監 春秋館事 世子傅로 贈職 되었다. 1630년 인조 8년 경오년 3월에 賜諡  文敏  이해에 公州 滄江에  書院을 建立하고 祭享 한다.

 1683년 숙종 9년 계해년에 滄江 祠宇를 滄江書院으로 승격 하고 肅宗이 治祭 하였다.


서해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