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조목종

한성부좌윤 도은 황준 평안도 병마절도사공 황사윤

qndns 2020. 2. 29. 10:35

漢城府左尹 道隱 黃준

1415년 태종15년 을미년 ~1483년 성종14년 계묘년

조선문신 호는 도은 본관은 창원 高麗門下侍郞 同中書門下平章事 懷山府院君 石奇의후손이요 증 이조참판 길도의 아들이다.

어려서 부터 자질이 介潔하고 강직하며 학문을 좋아하며 특히 敬直義方 四字에 全力하였다.

1451년 文宗원년 신미년에 文科에 급제했다. 이행에 京畿道 黃海道에 疾疫이 猖獗하여 道民의 사망자가 續出하였다. 임금이 이를 극정하여 天祭를 지내기로하고 친히 祭文을 지어 공에게 줌으로 공이 그것을 가지고 가서 제사를 지냈다.

1453년 端宗원년 계유년 西海방면 巡察使가 되어 疾疫에 시달리고있는 도민을 撫摩救恤하여 인심을 수습하고 도정을 안정시켰다. 1454년 단종2년갑술년 봄에 漢城府左尹이 되여서 積滯된 서정을 신속하고 공정하게 처결하였다.

이듬해 首陽大君이 端宗을 왕위에서 逐出하고 자신이 임금자리에 앉게되자 공은 벼슬을버리고 고향인 晋州 防禦山下로 돌아와 학문을 닦으며 여생을 보냈다.

문헌 장수황씨족보


平安道 兵馬節度使 공 黃斯允

생졸연대미상 조선무신 본관창원  의원군   거정의 손이요 三登縣令 효성의 아들이다.공은 容貌가 端雅하고 骨格이 長大하여 文武를 兼備하였다. 일찌기 武科에 及第한후 벼슬이 累進하여 平安道 兵馬節度使에 이러렀다.

어느날 世宗께서 여러신하와 같이 후원에서 잔치를 베풀었는데 공도이자리에 참석하게 되었다. 이때 마침 소리개 한마리가 날아와서 상위에 있는 술안주를 채어가지고 날아가는것을 세종이보고 주위에 있는 신하들을보고 말하기를 저 소리개를 누가 활을 쏘아 잡겠느냐고말했다.

이때 공이 곧 활에 실을 매워 그소리개를 쏘아 떨어뜨리니 세종이 기특하게 여기고 벼슬을 높혀주며 환대가 심우하였다.

문헌 창원황씨족보.


이조참판공 황보윤

생졸연대미상 조선 문신 본관은 창원 의원군 거정의 손자요 漢城判尹 효공의 아들이다.

1461년 세조 7년 신사년에 進士가 되고 1464년 세조 10년 갑신년의 增廣文科에 갑과로 급제하여 宣傳官이 되고 1467년 세조 13년 정해년에 禮賓寺 直長을 거쳐 濟用監  主簿가 되고 1470년 성종 원년 경인년에 軍資監 判官을 지내고 1473년 성종 4년 계사년에 承政院 校理가 되고  이듬해에 禮曹정랑이되고  1476년 성종 7년 병신년에  載寧 郡 守가 되었는데 이듬해에 凶年이 들어 飢餓민이 속출하자 공이 私財를 기울여 구제 하였다.

 1478년 성종 9년에  成均館 司成이 되고  1481년 성종 12년 신축년에  承政院 우부승지가 되고  1485년 성종 16년 을사년에  司諫院 大使館이되고  1488년 성종 19년 무신년에 咸興 大都護府使가 되고 1493년 성종 24년 계축년에 江原道 觀察使가 되고 1495년 연산군 원년 몇년에 功曹參判이 되고 그 이듬해에 吏曹參判이 되었다.

 공의 姻戚관계가 되는 昌山君 曹繼殷과 그의 아우 昌寧郡 曹繼商과 항시 정사와 학문을 토의 하였으며 尙友堂 許琮과는 交誼가 깊었다.

1501년 연산군 신유년에 사임하고 고향에 돌아와 학문에 정진하고 후진 교도에 힘썼다.

문헌 창원황씨족보



高原郡수 공  黃 澄

  1456년 세조 2년 병자년~ 1512년 중종 7년 임신년  조선 문신  응천 본가는 창원 의원군 거정의 증손이요 平安道 兵馬節度使 사윤의 아들이다

 공은 蔭補로 宣傳官 通禮院 引儀를 거쳐  洪川  縣監이 되었다가 다시 議政府 經歷 겸 司蓄  司憲府 鑑察  宗簿司 主簿를 역임하고 原州 判官으로 전임하였다.  공이 원주 판관으로 재직 중에  관내 상황 보고차   입조 하였는데  마침 成宗 깨서 여러 신하를 모아 놓고  후원에서 武藝 射擊을 하고 있었다. 공도이에 참가하였는데  임금이 공의 사격을 하는 것을 보고 어전에 불러서 경은 경의 조부와 용모가 흡사 하니 더욱 내 마음이 새롭다고 하였다. 그 후 儀賓府 道使가 되고 高原 郡守로 전임 되었다가 官職을 사임하는 하고 고향에 돌아와 학문에 힘썼다.  1512년  중종 7년 임신년 3월에 서거하니 嘉善大夫 戶曹參判  贈職하였다.

 문헌 창원 황씨 족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