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식 황정욱.황윤길.황진
掌隸院 判決事공 黃博
조선 문신 자는 中約. 본관은 장수 領議政 黃喜의 후손 이요 僉知中樞府事 恬의 아들이다. 1528년 중종 23년 무자년의 進士試에 及第하고 1532년 중종 27년 임진년에 別試文科에 을과로 급제하여 弘文館 正字를 지내고 그 후 東來府使가 되었다가 掌隸院 判決事과 되었고 1544년 중종 39년 갑질 中宗 말년부터 尹衡元이 大尹 尹任과 서로 싸우던 중 1545년 인종 원년 을사년에 仁宗이 卽位한지 8개월만에 昇遐하고 明宗이 12 세로 즉위하였는데 尹衡元의 누님이 되는 文定王后가 垂簾聽政을 하면서 朝廷의 일을 尹衡元이 마음대로 壟斷 하게 되자 누님 일파를 逆謀로 몰아 많은 선비들이 賜死 또는 流配 될 때 공이 連坐되어 流配되었다. 공은 乙巳名賢의 한 사람으로 일컫는다. 議政府 左贊成 에 贈爵 되었다. 문헌 : 한국 인명대사전 장수 황씨 족보.
承政院 承旨공 黃廷式 1529년 중종 24년 기축년~ 1592년 선조 25년 임진년
조선 문신 자는 景中 본관은 장수 領議政 黃喜의 9세 손이요. 五衛將 悅의 아들이다.
1561년 명종 16년 신유 연애 式年文科 을과로 급제하여 累進 되여 吏曹參議에 이르렀고 1592년 선조 25년 임진년에 壬辰倭亂이 일어나 宣祖가 平壤으로 罷遷하게 되자 임금을 扈從 하였다가 平壤城이 陷落될 때에 이해 6월 16일 殉國하였다.
扈聖從勳에 錄名이 되고 吏曹參判, 弘文館 提學에 贈爵 되었다. 亂軍中에 收屍가 되지 못하여 衣履를 坡州 金蠅里 安葬하였다.
문헌 한국인명사전. 장수 황씨 족보
禮曹判書 겸 大提學 文貞公 黃廷彧
1532년 중종 27년 임진년~ 1607년 선조 40년 정미년
조선 문신 나는 景文 호는 芝川 本貫은 長水 領議政 黃喜의 후손 이요. 副護軍 열의 아들이다.
1552년 명종 7년 임자년에 司馬試에 합격하고 1558년 명종 13년 무오년에 式年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여 史官이 되었다가 司諫院 正言 應敎 世子侍講院 文學. 司憲府 執義 등을 역임하였으며 1580년 선조 13년 경진년에 晋州 牧使를 거쳐 忠淸道 觀察使가 되었다.
李朝 建國 초부터 李成桂의 부친이이 麗朝末 權臣 李仁任이 명나라의 잘못 기록되어 있는 것을 訂正 하려고 여러 차례 명나라에 진정 하였으나 성공 치 못하고 오던 중, 1497년 명나라 효종 10년 정사년에 명나라 신하 徐簿 등이 勅命을 받들어 大明會典의 編纂을 시작하여 1502년 명나라 효종 15년 임술년에 訂正치 못한채로 發刊 되였든 것이다.
공이 承政院 承旨에 올라 1584년 선조 27년 갑신년의 宗系辨誣奏請使로 명나라에 가서 수완을 발휘하여 잘못된 大明會典 改正刊行한 후 돌아와 同知中樞府事가 되고 이어 戶曹判書 升進하였다.
1592년 선조 23년 경인년에 宗系辨誣의 공으로 光國功臣 1등에 輔國光祿大夫가 되어 長溪府院君에 봉해 지고 禮曹判書겸 大提學이 되고 文衡에 올랐다.
1592년 선조 25년 임진년에 壬辰倭亂이 일어나자 號召使가 되어 王子 和順郡 珤를 陪從하여 江原道에 들어가 義兵을 召集하는 檄文을 작성하여 八道에 돌렸다.
倭軍의 進擊으로 會寧이 들어갔다가 會寧府 아전으로 있던 謀反者 鞠景仁에 의하여 臨海君 津과 和順郡 珤아 함께 잡히게 되었다.
鞠景仁은 會寧府 아전으로 있으면서 평소에 조정에 怨恨을 품고 있던 자인데 왜장 加藤淸正의 군대가 會寧이 쳐들어오자 惡黨들을 모아 反亂을 일으켜 두 왕자와 함께 공을 포박하여 대장에게 넘겨져 安邊 土窟에 감금되었다.
이때 加藤淸正으로부터 공에 대하여 선조에게 降伏 勸誘文 쓰라고 强要당하였었으나 공이 이를 拒否하자 降伏勸誘文을 쓰지 않으면 공의 손자와 두 왕자를 죽이겠다고 협박하였다. 일이 이렇게 되자 공의 아들 赫이 공 몰래 공을 대신하여 降伏勸誘文을 썼다.이 글을 쓴 아들 최근 그 항복 권유문 內用이 거짓임을 밝히는 또 한 장의 글을 써서 體察使에게 주었으나 이를 입수한 제철사가 항복권유문 만을 임금에게 보내고 항복 권유 문이 거짓 글이라이 그런 보내지 않고 묵살해 버렸다.
이듬해 부산에서 倭敵으로부터 釋放되어 돌아왔으나 降伏勸誘文 때문에 反對派들의 탄핵을 받아 吉州에 유배되었다가 1597년 선조 30년 정유년에 配所에서 풀려나았으나 復官 하지 않은 채 逝去하였다.
그뒤 원통하고 억울한 누명은 풀려지고 領議政에 追贈되었다. 文章 詩에 능하였다. 시호는 문정이다.
저서 지천집
문헌 선조실록 당 집 국조인물고 장수 황씨 족보. 한국 인명대사전.
兵曹參判 우송당구공 黃允吉.
1536년 중종 31년 병신년~ 서거 연도 미상 조선 文臣 자는 吉裁 호는 운송 당 본관은 장수 領議政 黃喜의 후손 이요 徵의 아들이다. 1561년 명종 16년 신유년에 式年문과에 병과에 급제하고1563년 명종 18년 계해년에 司諫院 正言을 거쳐 1567년 명종 22년 정묘년 司憲府持平이 되었다.
그 뒤여러 벼슬을 거처 1585년 선조 8년을유년에 黃州 牧使를 지내고 兵曹參判에 이르렀다.
1589년 선조 22년 기축년에 日本政府로부터 使臣을 日本에 보내 달라는 要請을 받아 오던중 日本 使臣 玄素가 세 번이나 와서 要請하였다. 이에 우리 朝廷에서 이해 9월에 사신을 派遣키로 決定하고 공이 正使가 되어 副使 金誠一 書狀官 許筬 車天輅 와 武官 黃進 등을 引率하고 일본 사신 玄蘇 宗義智 등과 함께 이듬해 3월에 서울을 출발하여 일본으로 향하게 되었다.
가는 도중 對馬島에서 한 달 동안 滯留하다가 7월에 日本 京都에 倒着하여 11월에 일본 關白 風臣秀吉를 만나게 되었다. 풍신수길의 內心을 여러모로 살피고 1592년 선조 24년 신묘년 1월에 歸國하여 上奏 하기를 풍신수길의 눈이 빛나고 膽略있는 자로서 장차 우리나라를 위해 침해할 우려가 있으니 시급히 國家 防衛에 대책이 필요합니다.라고 선조에게 아뢰 었다.
이때 副使로 같이 갔던 金誠一은 선조에게 상주 하기를 쥐새끼 같은 풍신수길이 감히 조선을 침략할 생각을 못 할 것이니 이 태평 시대의 민심을 소란케 하는 전쟁 준비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라고 말했다
이렇게 정사 黃允吉과 부사 金誠一의 상반된 상주에 선조는 부사 김성일의 말을 따랐다. 당시 부사 김성일은 동인이였는데 조정에는 동인 세력이 강하였으므로 부사 김성일의 상주가 채택되고 정사 황윤길에 상주 한 것은 말살된 것이다. 선조는 공의 말을 듣지 아니 하고 無防備 상태로 있다가 오늘 당하게 되었다.
1592년 선조 25년 임진년에 처참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공의 말을 따르지 않았던 것을 크게 후회하였다.
報牒에의하면 묘소가 고양군 신도면 지축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無後하여 失傳 되었다.
문헌 선조실록 장수 황씨 족보 한국 인명대사전
병마절도사 무민공 황진
1550년 명종 5년 경술년~ 1593년 선조 26년 계사년 조선 무신 자는 명보 본관은 장수 領議政 황희의 5대 손이요 참의 윤공의 아들이다. 南原 出身으로 어려서부터 성품이 孝順 하였으며 힘이 과인 하여 활쏘기와 말 달리기를 좋아 하였는데 무에는 미칠 자가 없었다 활은 百發百中 말타기는 飛虎와 같았다. 1,576년 선조 9년 병자년 春別試에 병과로 급제하여 訓練院 奉事가 되고 그 이듬해에 宗系辨誣사 黃琳의 軍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1579년 선조 12년 기묘년의 춘시에 1등 상을 받고 兵馬節度使 副尉가 되었다가 그 해 추시에 또 1등을 하여 秉節校尉가 되고 이듬해에 宣傳官이 되었으며 1582년 선조 15년 임오년에 居山 擦訪이 되었는데 그 이듬해 봄에 북방 오랑캐가 변방을 침범 하자 慶源 府使 김수가 성을 버리고 도망 하니 전세가 크게 불리하였다. 이때 공이 적진에 뛰어들어 많은 적을 斬殺하고 적군을 후퇴시켰다.이 무렵 友人 이첨사가 군문에 죄를 짓고 군공 있어야 풀려 나오게 되어 있었다. 공이 자기가 세운공을 그에게 주어 면제가 되게 하였으며. 공도 加資가 되었다.
1584년 선조 17년 갑신년에 北兵使 李鎰의 裨將이 되었으며 그 다이듬해 安原保. 權管 이되었는데 城疊이 모두 퇴락 된 것을 공이 힘써서 개축 하였는데 이 사실을 오래도록이 지방 사람들이 일컫고 있다. 이때에 동향 출신 양응호가 국경 병역에 나갔다가 만기가 되어 돌아 가는 도중에 타고 가든 말은 폐사 하였고 종은 병이들어 돌아갈 길이 막연하였다. 말과 종을 주어 돌아가도록 하였더니 양응호가 죽을 때까지 감읍 하였다.
1588년 선조 21년 무자년에 다시 宣傳官이 되어 還京한 후 1592년 선조 23년 경인년 2월에 從叔인 通信使 黃允吉을 따라 공은 軍官으로 副使 金誠一. 從事官 許筬. 車天輅 등과 함께 일본에 도착하니 豊臣秀吉의 위시하여 倭人들의 侮辱과 脅迫이 심하였으나 공은 驚動 하는 빛이 보이지 않으니 뭇 사람들이 모두 驚歎 하였다.
使臣 一行이 一本에 처음 도착하였을 때의 倭人들이 路傍에 과녁을 세우고 활을 쏘면서 시위 하였는데 과녁의 거리는 50보에 불과했다. 공이 그 옆에 그보다 작은 과녁을 세우고 百發百中 하니 많은 일인들이 보다가 공의 활을 한번 시험해 보고자 함으로 공이 활을 주어 왜인들이 서로 돌려 가면서 당겨 보았으나 활 시울이 열리지 않으니 모두 놀라는 빛이였다. 또 사신 일행이 바닷가에 가는데 물새 두 마리가 바닷물 위에 떠 있었다. 공이 활을 쏘아 그중 한 마리를 맞추고 또 다른 한 마리가 날기 전에 쏘아 맞히니 그것을 보는 사람들은 모두 경탄 하였다. 이때 通信使 일행에 대하여 日本政府로 부터 路銀支給이있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 돈으로 다투어 寶物을 샀지만 공은 혼자서 寶劍 두자루를 사니 어떤 사람이 그 이유를 묻기에 공은 대답하기를 왜적이 멀지 않아 바다를 건너서 우리 강토를 侵犯할 것이니, 그때이 칼을 쓸 것이다. 하니 모두 그 말을 일소에 붙였으나 그후 許筬공이 공이 殉節 한 후에,그 先見之明에 歎服하였다.
通信使가 일본에 가기 전에 朝廷 의론이 통일되지 못하여 斥和論과 交隣論이 양립 되었다. 처음부터 공은 交隣론자에 대하여 義憤을 금치 못하였으므로 끝내 부사 金誠一 과는 사이가 좋지 못하였다. 1591년 선조 24년 신묘년에 朝廷에서는 倭亂이 있을 것을 念慮하여 각도에 防止對策을 示達하고 있었다. 이해 봄에 일본에서 돌아온 使臣 일행이 다 말하기를 멀지 않아 저 大巨 侵入할 것이다.고 하였는데 부사 金誠一 만이 임금 앞에 나아가 주장하기를 적이 來侵할 이유는 만무합니다. 라고하여 선조가 그의 말을 따르게 되어 防備策을 모두 撤回하였다. 이때 부사 김성일의 言動에 激憤한 공은 欺君罔上하는 부사 金誠一을 참하고 水軍을 强化하여 倭敵을 막을 計策을 상소하려 하였으나 門族들이 화를 두려워하여 상소하지 못하였다. 이해에 공이 이전에 宗系辨誣사
隨員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공로로 光國功臣 原從三等에 宣略將軍 되었으며 이해 7월에 濟用監 主簿가 되었다가. 동북 縣監이 되어 赴任 하려 할 때, 이웃집에 말 한 필이 있었다 營養失調가 되어 비록 瘦瘠 하였지만 양 말이어서 戰爭에 적합하리라고 생각하고 重價로 사들여 任地로 몰고 갔다. 잘 養育하여 매일 달리며 訓鍊을 싸왔는데 후일 熊峙. 利峴 沙平. 晋州등지의 戰鬪에 이 말을 사용하였다.1592년 선조 25년 임진년에 4월에 왜적이 大擧 侵寇 하니, 각 州郡이 陷落되었다. 이해 오월에 全羅監司 李珖. 兵使 최원경, 卿相監司 金수 등이 수만명을 거느리고 忠淸監司 윤국현과 합세하여 북쪽으로 進軍 하다가 京畿道 龍仁에 이르러 적을 만나게 되자 交戰도 못하여 보고 敗散하였다. 공은 水原 沙僑에 伏兵 하고 있으면서 본군이 潰走한 것도 모르고 督戰 하다가 적병의 공격을 받자 비로소 깨닫고 군사를 거두어 가지고 돌아왔는데 피해가 조금도 없었다. 이해 7월에 熊峙戰功으로 訓練院 判官이 되고 다시 여러 戰鬪에서 많은 공을 세우고 益山 郡守 겸 忠淸道 助防將이 되었다. 겨울에는 서울에 들어온 적을 討伐하기 위하여 監司 權慄은 幸州城의 兵使 선거이 水原 퇴성에 각각 진을 치고 있었다. 공도 군사를 거느리고 出戰 하였는데 하루는 사평의 이르러 돌연히 적 부대를 만나게 되자, 사병은 모두 흩어져 갔으나 공은 홀로 抗戰하다가 包圍당하여 돌아가지 못하자 諸將들은 모두 말하기를 黃助防將은 戰死한 것이 틀림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공은 그로부터 이틀 후에 적의 包圍網을 뚫고 돌아오면서 我軍이 잃었던 戰馬까지 奪還하여 가지고 오니 士兵이 다 驚服하였다. 1593년 선조 26년 계사년 오월에 忠淸道 兵馬節度使가 되었다. 이때 공은 安城에 移陣하고 있었는데 我軍이 平壤과 開城을 수복하고 都城을 탈환 하자, 倭敵이 남쪽으로 後退하기 시작했다. 공이 그 적을 쫓아 慶尙道 尙州까지 가서 적을 敗散시키고 宜寧을 거쳐 咸安에 이러니 尙州 이남의 敗敵들이 集結되어 敵勢가 대단하였다. 咸安성은 좁아서 공수가 다 곤란하므로 倡義使 金千鎰 慶尙右兵使 崔慶會 金海府使 李宗仁등과 함께 晋州성으로 移陣 하였다. 이해 유월십오일에 敵將 加藤淸正은 晋州성을 包圍하였다. 적은 성을 파괴하고 침입을 기도하는 동시에 성밖에 토산을쌓아 성안을 내려다보며 砲擊전을 하였다. 이때공은 陣頭에서 적과싸우는한편 성을 수축하는 데도 앞장을 서서 분전하여 一進一退의 격전 8일만에 적을 哨戒하다가 流彈에 맞아 순국하였다.
진주성은 드디어 적에게 陷落되고 倡義使 金千鎰,慶尙右兵史 崔慶會등 수십명의 제장과 6만여명의 군관만이 陷沒 되었다. 공이 진주성으로 들어가 직전에 倡義使 金千鎰창의사 김천일을 보고 진주는 地勢를 보아 다함께 성안에 들어갔다가 外援이 없으면 孤立을 면치 못할것이니 나는 성밖에서 진을치고 있으면서 기각의세를 취하는것이 좋으리다. 하였다.
金千鎰이 이를 듣지않고 오히려 위험한 때를 당하여 苟生을 꾀하는것으로 誤解하므로 공은 먼저 성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진주에 오기전에 창원에서 倡義隊將 郭再祐가 공에게 말하기를 진주성은 앞이 강이요 뒤는 산이 둘러쌓여 있으므로 만일 적이 要衝을 占據하고 援兵이 오지않으면 대단히 위험한 곳이니 공은 성안에 들어가지 않는것이 좋으리라.고 하였으나 공이 말하기를 창의에는 서로 약속이 있으니 내독자 행동은 있을수 없다. 하고 듣지 않았다.
이때 忠武公 李舜臣이 閑山島에서 晋州성이 陷落 되 었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 黃進. 최경회. 金千鎰.李宗仁. 金俊民.등이 죽었다는 것은 믿어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해 팔월에 議政府 右贊成에 贈爵 되고 1607년 선조40년정미년에 崇祿大夫 議政府 右贊成 겸 判義禁府事 先武 原從功臣 一等에 追贈되고 시호는 武愍이다.
이해에 晋州에 彰烈祠를 建立하고 공과 함께 金千鎰. 최경회등을 祭享하였다.
1611년 光海君 삼년 신해년에 남원에 貞忠祠를 세우고 祭享한다.
문헌: 선조실록, 해동 명신록, 남중일기, 징비록, 한국임명대사전. 장수황씨족보.남원군지. 무민공실기.